1월 15일 연중 2주일 

제 1 독서    이사야 1 49,3.5-6.
제 2 독서    코린토 서 1 1,1-3. 
복 음          요한 1,29-34.  

우리는 각자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일과 사랑, 사랑과 일, 그것이 전부(Work and Love, Love and Work, That's all)" 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돈이나 지위, 명성, 행복 같은 단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모든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얻게 되면 그에 따르는 것을 함께 누리게 되기도 하고, 하나를 잃게 되면 일부를 잃은 것이 아니라 거의 전부를 잃게 되어버리는 체험을 합니다. 어떤이는 돈만 있으면 그와 함께 편리함을 누리고 걱정거리로 부터 해방될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하게 될 수 있을 거라 여깁니다 . 또 돈이 있으면 구지 일을 해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많은 여가시간을 누릴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건강을 잃으면 다른 모든것이 의미를 잃기 때문에 건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길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삶의 중심가치를 "일과 사랑" 이라고 했습니다. 다른이들이 말하는 돈이나 자부심, 행복, 만족감, 평화 등과 같은 가치는 "일과 사랑"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서 얻어지는 것으로 본것입니다. 

"일과 사랑"은 어느 경우 같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일을 사랑하게 될수도 있고 사랑하는 것을 매일 일삼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 "과 "잘하는 것"이 같고 자기의 "일" 을 "사랑"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일과 사랑을 구분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삶에서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우리는 일상안에서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나가게 됩니다. 

흔히 "일"이라고 하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어에서 Work은 Job과 는 다른 말입니다.  일의 범위는 직장이나 직업의 범위보다 더 넓습니다. "일" 의 사전적 의미는 이루고자 혹은 마무리 짓고자 하는 어떤것 입니다. 은퇴해서 직장이 필요없어진 사람에게도 일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만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에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서도 매일의 삶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건강한 몸과 정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은퇴한 어떤이는 자원봉사를 일삼아 할 수도 있고,  조그마한 정원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아마도 공부나 연구가 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매일의 일이 될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경우는 기도와 성사거행과 매일의 삶을 거룩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자체가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의 인간다움과 거룩함을 구성하는 핵심은 아마도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족, 친구들과 누리는 사랑과 우애, 친절과 환대, 위로 등이 빠져버린다면 아마도 일상은 메마르고 푸석거리는 먼지와 같은 것이 될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반려 동물이나 식물을 아끼는 물건을,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능력은 의외로 큽니다. 우리는 보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숨쉬는 모든것 뿐아니라 난초나 수석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처럼 식물이나 돌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와 교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같은 쇠덩어리도 사랑 할 수 있고,  수석과 같은 돌멩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매일 성실하게 유지하는 삶의 태도,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사랑은 오래 참는것 무례하지 않는것,  성내지 않는것,  그의 모든것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날아온 큐피트의 화살에 맞아 눈이 멀고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내  삶을 다해 헌신할 대상을 결정하고, 매일 그 결정에 충실하는 바른 마음속에서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아침마다 일과 사랑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오늘 누구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 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서신 분"(1,30)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앞의 말에 비추어서 세례자 요한의 일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의 "일"은 아마도 "회개를 선포하는 것" 과 그 이름대로 "세례" 였습니다. 그 일은 많은 보수를 받는 직업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공인되거나, 인기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고,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 자신이 꼭 해야할 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세상의 평판이나 인정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신만의 일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러한 시대가 꼭 오게될 것입니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기존에 인간이 하던 일을 대체해 가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변화 안에서 사람들은 더더욱 기계로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압력과 관계없이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찾아야 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닮아 가는 일을 하게 될것입니다.  보수나 지위 직함에 관계없이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일은 어떤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사랑한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하느님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맨처음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늘 복음에서 소개하듯이 그 하느님을 실제로 보게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평생토록 사랑하고, 따르고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을 직접 만나는 것처럼 큰 행운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또 그분에 대한 합당한 증언을 했습니다.  요한은 로맨스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눈 먼 사랑"을 한 것 이 아니라, " 눈 밝은 사랑"을 했습니다. 이렇듯 진실한 사랑은 우리의 시야를 가두고 어리석게 만들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이 못보는 것을 보게 만드는 힘이 있고,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는 지혜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일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세상의 틀에 맞추어진 일을 하지도 않았고, 보이는 매력적인 대상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만의 일을 했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결국에는 그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나름의 일과 사랑을 찾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그 일과 사랑에 성실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 일과 사랑이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고, 축복이 주어지는 통로일 것입니다. 일과 사랑을 통해 복을 지어내고  은총을 나누는 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