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연중 3주일 


제 1 독서 이사야 8,23ㄷ -9,3.

제 2 독서 코린토 1 1,10-13.17. 

복 음        마태 4,12-23.


200여 년 전 한국에서 가톨릭이 박해를 받았을 때, 가톨릭 신자들은 그 박해를 피해서 마을을 이루고 옹기를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성지라고 부르는 곳과는 별도로 그러한 교우촌들은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우촌들이 있는 곳은 대부분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도시와 사람들로부터 잊힌 곳입니다. 그 외딴곳들은 행정과 치안의 경계지역입니다. 아마도 박해 시대 때에 경기도 쪽에서 교우들을 잡으러 오면 강원도 쪽으로 피신하고 평야 쪽에서 포졸들이 몰려오면 깊은 산이나 강 건너로 피난하기 쉬운 중간지역에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지역은 몸을 피해 달아나기에는 좋은곳이지는 몰라도 외딴곳이기 때문에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삶을 살아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주변이나 경계지역이 아닌 중심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서울시민, 뉴욕커, 파리지앵으로 불리고 싶어 합니다. 권력의 중심, 돈이 모이는 곳, 사람과 기회가 역동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그곳에 있고 싶어 합니다. 모든 자원을 지식, 권력, 기회, 자본 등 주변으로부터 빨아들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중심은 주변보다 더 화려하고 더 거대하고, 더 역동적이고,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중심의 활력과 규모에 매력을 느끼고 그곳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 때문에 스스로 경계인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물러나 외딴곳에 머물며 사람과 자연의 경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 거룩함과 세속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쪽과 저쪽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기에 그들의 처지는 항상 어중간하고 불안했습니다. 대부분 주변인은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밀려나고 소외된 처지로 여기기 쉽습니다. 미국을 힘의 중심으로 보면 한국은 주변에 있는 열등한 나라로 간주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서울 이외의 지역에 사는 이들은 2등 시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낙후되고 척박하다고 여겨지던 그 변방을 일구어서 새로운 중심을 일구어냅니다. 외딴곳을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 로마 박해시대 때, 인적이 드문 로마의 외곽에 동굴 무덤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머물려고 하지 않은 외딴곳 죽음만이 가득한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새로운 믿음의 중심을 이루어 냅니다. 한국에서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스스로 주변으로 물러나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희망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자리잡은 곳이 어디인지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입니다."(마태 21,11) .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갈릴래아가 아니라 성전과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입니다. 성전은 많은 사제들이 머물고 매일 제물이 바쳐지고 밀려드는 순례 인파로 항상 시끌벅적했던 곳입니다.  왕궁은 대내외적인 영향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헤롯왕의 연회에서 죽임을 당할 만큼 모든 중요사건이 시작되는 곳이고 마무리되는 곳이었습니다. 또 왕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도 밖에서 보기에 중요한 것 처럼 비추어지는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갈릴래아는 초라한 변방의 시골 지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갈릴래아를 가리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4,16)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 복음에서도 갈릴래아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 곳, 메시아가 나올리 없는 신앙적으로 소외된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찬란하고 빛나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가장 먼저 가겠다고 예고하신곳이 갈릴래아 였습니다.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것이다. "(마르 14,28) 부활의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지방으로 퍼져나 간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그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전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곧바로 아무런 가르침이나 기적 없이 십자가 형에 처했습니다.  그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기적을 베풀고 가르치셨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예루살렘이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중심은 많은 이가 모이는 기회의 장소이지만 한 개인이 쉽게 버림받고 소멸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 미국 잭슨빌, 게인즈빌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수가 아닌 소수, 중심이 아닌 주변 주류가 아닌 비주류입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음식은 이곳에서는 낯선 것이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이곳에서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습니다.  그전에 알았던 모국어는 잊어가고, 이곳의 말을 원어민처럼 능숙하게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방관자일 수 밖에 없고, 이곳 미국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떨어져 나온 주변인이고, 미국에서도 주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경계인으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닮아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지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주변에 머물렀지만,  삶의 중심 하느님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류와 중심에 있는 이들은 지켜야 할것들이 너무 많으므로 낯선 변화를 외면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또 그들의 삶은 권력과 재물의 오감에 따라 많은 부침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도 중심의 뒤에 숨어있는 완고함과 황폐함을 보셨기에 오히려 변방의 시골에서부터 당신의 일을 시작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살고있는 이곳이 중심인지 변방인지가 아닐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고 뿌리내린 삶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내 이익이나 재산 권력 등을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또 이러저러한 뉴스나 사건에 우리는 흔들거리고 비틀거립니다.  넘어져도 쉽게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바른 중심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매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그분께 의탁할 수 있을때, 우리는 내가 서 있는 곳을 새로운 중심으로 만들고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