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연중 30주일
제 1 독서 탈출기 22,20-26.
제 2 독서 데살 1서 1,5ㄴ-10.
복 음 마태 22,34-40.
10여년전에 TV에서 베네딕토회 수사님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습니다. 기자가 "수도 생활 중에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하고 물었을때 그분은 망설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같이 사는 거요!"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다른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그분의 고백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알고 있고, 나를 잘 알고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친밀함으로 위안과 기쁨을 누릴 때도 있지만, 그들과 주고받는 아픔과 실망으로 괴로워합니다. 또 미움과 분노를 다루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독신으로 살아가는 저 보다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분들이 훨씬 더 빈번하고 깊게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각박한 현실과 동떨어진 한가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또 강론 때에는 사랑과 자비를 외치면서도 실제 사목과 결정은 힘과 지배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 사목 자의 설교는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랑에 대한 섣부른 강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염불이 되거나, 말하는 이의 행동과는 너무 다른 허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에 대해 강론을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론 때에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완덕과 거룩함에 비해서 실제 저의 삶은 비루하고 초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완덕의 길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저의 공적인 직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나아갈 길을 함께 바라보고, 더불어 나아가자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 부족한 설교자에게 주어진 괴로운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물음에 대해 두 가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계명의 형태로 전달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대화나 권고, 충고와 가르침, 명령과 법률 등의 다양한 전달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의 내용에 항상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의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고,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만일 어떤 법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고려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뿐입니다. 순종 아니면 불순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내가 어느 상황에 놓여있든지 들어야 하는 절대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흔히 사랑을 매력을 느끼거나, 좋은 감정과 느낌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랑의 반대로 여기는 미움이나 원망 등이 감정과 연관되어 있어서 사랑 또한 미움의 반대감정 정도로 여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감정보다 더 큰 삶의 태도, 결심, 행동과 마음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제껏 접한 사랑에 관한 훌륭한 정의 두 가지는 "사랑은 동사(verb)"는 것과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C.S.루이스라는 사람이 지은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선임인 악마가 신출내기인 악마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유혹할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주는 내용의 픽션입니다. 이 글은 우리 내면에서 생겨나는 어둠과 오해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습니다.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환자가(사람이) 제 마음속만 줄곧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게 만들어라. 환자가(사람이) 원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려 하거든 실제로 사랑을 구하는 대신 사랑의 감정을 저 혼자 꾸며 내려고 애를 쓰게 하는 한편 제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란 말이지. 용기를 구하려 하거든 마치 용기가 불끈 솟아나는 것처럼 느끼려고 애쓰게 하고, 또 용서를 구하려 하거든 용서받은 것처럼 느끼려고 애쓰게 하거라.."
랑은 감정과 느낌에 만족하거나 도취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고, 어떤 태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어쩌면 그 모든 노력을 다하고 난 다음에 얻어지는 열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린도 전서 13, 4-5에는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불친절하게 대하고, 무례하고, 성을 내며 대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부분 가장 가까이 지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첫 번째로 사랑해야 분은 하느님입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일까요? 아마 자기의 힘과 의지만으로 사랑을 지탱하고 키워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되고, 그분을 알게 되어 얻는 그 힘으로 우리는 상처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기도를 통해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세상의 평화와 정의, 무기력한 이들을 돌보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것 등 을 나 또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될수록, 거꾸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분이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 또한 그분이 창조하시고 마음에 들어서 하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다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은 바다가 된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 떨어지면, 우리 영혼은 하느님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점점 하느님을 닮아가고 그분과 하나 되어 갑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큰 뜻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의 길에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미움과 원망을 다루지 못하고, 섣부르게 마음을 열어 상처를 입고, 과거에 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우리는 아픔을 통해서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한번 또는 여러 번 넘어지는 것은 성장하고 배우기 위해 겪어야 하는 당연한 과정 일부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워가듯,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워갑니다.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내려놓는 것이고, 말하는 것보다는 들어주는 것이고, 받는 것보다는 내어주는 것이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아주는 것이고, 앞에서 이끌어 주는 것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을 배우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