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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연중 31주일
제 1 독서  말라키 1,14ㄴ-2,2ㄴ.8-10.
제 2 독서  데살1서 2,7ㄴ-9. 13.
복    음   마태 23,1-12.
신영복 선생의 책 [담론]에는 별명이 '노랑머리'라는 대전 중동에서 몸을 파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얼마나 성깔이 드셌던지 그 어떤 폭력배도 이 여자의 기를 꺾지 못했다고 합니다. 머리채를 잡혀 골목을 끌려다녀도, 유리창을 깨뜨려 배를 긋고 피 칠갑을 하고 덤빌 정도여서,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주국방'체재를 확립한 그런 여자였다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묻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직자가 이 노랑머리에 여자다운 품행을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여자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인간에 대해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제라는 직무상 많은 분과 대화하고 면담을 하게 됩니다. 그때 언제나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충고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은 매우 섬세한 배려와 깊은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섣부른 충고는 오히려 자기 자랑이 되어버리고, 섣부른 판단은 오해와 상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옳고 그름의 식별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나 입바른 충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뭐가 옳고 틀렸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비록 초라하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의 처지에서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존중을 바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정보를 거의 무한대로 찾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더 좋은 말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야기를 존중하고 공감하며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목소리가 커질수록 귀해지는 것은 그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오해보다는 이해가 깊어질 것이고, 서로에 대해 더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 사이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은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시면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신앙과 전통에 충실했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또 학자라는 신분이 주는 권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과 행실을 전부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십(Leadership)이 있습니다. 보통 지도자가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의 역할과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지도자만큼 중요한 부분이 그를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역할(Fellowship) 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사뭇 다르다면 그의 영향력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지도자 한 사람에게서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2차대전의 원인을 히틀러라는 한 사람으로 단순화시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아무가 악하고, 많은 죄를 저지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판단과 행동에 협조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는 무기력했을 것입니다. 세계대전을 치를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고, 수백만 명을 죽일 정도로 그의 힘이 세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동조하고 순응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뒤에 서기만 하면 나도 지위가 높아지고, 부자가 될 거라고 욕망했던 이들이 히틀러와 함께 그 비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도 부패하기 쉽지만, 그 권력에 줄을 댄 사람들도 그에 따라 쉽게 눈이 어두워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극은 역사 안에서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배운 사람, 말하는 사람이 아닌 낮은 사람,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 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에서는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켜라"고 하셨지만, 역사 안에서는 실행하고 지켜서는 안될 말을 했던 지도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행동뿐 아니라, 말조차도 따라 할 수 없었던 함량 미달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또한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 똑같이 지도자가 있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지도자들과 우리는 어떻게 협력해야 할까요? 우리 본당에 한정 지어서 말씀드리자면, 만일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면, 그의 Leadership을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된 Leadership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보면 가장 신뢰할만한 Leadership의 모습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흔히 Leadership을 높은 지위나 장악하는 힘, 카리스마나 인기를 얻는 것 같은 특별한 기교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높은 지위는 더 큰 영향력을 의미할 뿐, 더 깊은 신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은 어느 정도 분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구분되어 있고, 각각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하느님과 별로 상관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이 많아지고 뚜렷할수록 편하고 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법을 잘 알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법을 더 안 지킬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의무는 없이 특권만 챙기기에 바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최소한 한가지 영역에서는 통합을 이루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 통합입니다. 그것이 나의 말에 힘을 더하는 과정이고, 내 행동에 진정성을 채우는 가장 바르고 빠른 방법이 아닐까요?
세상에 안에서 우리의 처지는 거의 항상 위아래로 끼어 있습니다. 책임이나 직분상 누군가의 위에 있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래에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격을 갖추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나를 성장시켜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바램은 나를 따르는 사람도 비슷할 것입니다. 내가 이끄는 사람들은 나의 말과 행동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과연 따를만한 것인지 식별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로 그들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더 깊은 인격을 갖추라고, 더 좋은 모범을 보이라고 재촉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느 직분에 있든지 맡겨진 직분에 성실하고, 특히 나보다 더 작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좋은 모범을 보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