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12.3.17 대림 1주일



제 1 독서 이사야 63,16-17.19;64,2-7.
제 2 독서 코린토 1,3-9.
복 음 마태오 13,33-37.

오늘은 대림 1주일, 전례력으로는 새해이고 양력으로는 올해의 마지막 달이 겹치는 때입니다. 신앙안에서는 기다림과 준비의 시기이고, 세상에서는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때입니다. 사뭇다른 의미가 겹치는 이 시기에 최근에 겪은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2주전에 잭슨빌에서 있었던 동남부 꾸르실료 봉사자 재교육에서 시작되었던 일입니다. 그 교육은 11월 17부터 19일까지 2박3일동안의 일정으로 40여분 정도가 참석하셨습니다. 그중에는 잭슨빌에서 차로 12시간 정도 떨어진 알라바마의 헌츠빌 공동체에서 오신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그 분은 3년 전부터 다른 피정이나 행사때에 여러차례 뵙던 분이셨고, 그 때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잭슨빌에 방문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연세 때문에, 직접 운전할 수 없는 사정으로 방문이 미뤄지다가 기회가 되어 본당의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오실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육장소는 강가 바로 옆에 있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고, 특히 플로리다 11월은 날씨가 좋아서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육에서 토요일 오후까지 강의를 하고, 저녁에는 공소미사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교육 참가자들이 주일에 잭슨빌 성당에 오셔서 미사에 참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분께도 내일 만나자고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그분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911을 통해서 병원으로 급하게 후송되고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소식을 듣고, 미사 후에 병원을 방문했지만 제가 할 수있는 것은 병자성사를 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가족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확률이 15%정도이고, 깨어 나셔도 몸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는 어려울거라는 의료진의 집에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에서 차로 12시간 떨어진 곳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신 그분을 보면서,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착잡하고 우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눈을 뜨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말씀까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까닭을 묻자, 의사들도 놀라워하면서 이 케이스를 학회에 보고해도 되겠느냐며 동의를 얻어갔고, 아마도 제 시간을 놓치지 않고 치료가 되어 이런 기적같은 일이 생겨난것 같다고, 아마도 헌츠빌 댁에 머물렀다면 제 시간에 병원에 가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문데, 그때에는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오직 감사와 은총을 느끼며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같은 일이 믿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이후에 이어질 긴 투병생활의 시작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시간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병세에 따라 저의 기도와 마음이 한 주간동안 갈피를 못잡고 요동쳤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걱정과 근심으로, 또 원망섞인 기도가 되었다가 다시 감사와 기쁨으로 바뀌고, 다른 한편으로 긴 어려움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 왔다갔다하는 저의 내면을 보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감정과 마음의 변덕때문에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그 변덕에 따라 생겨나는 불평과 의심이 저의 기도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람의 변덕과 조급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당신의 속도와 방법으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만을 보고 왔다갔다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역사와 시간의 긴 흐름을 통해 섭리하십니다. 어느때는 성공과 번영으로 이끄시고, 어느때는 참담한 실패와 고통으로 이끄십니다. 이 사건이 지금 나에게는 큰 고통이지만, 언젠가 일어날 기적의 시작일 수 있고, 이 일이 당장 큰 성공으로 보이지만, 큰 책임과 무거운 부담을 져야하는 첫걸음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바뀌는 눈앞의 일로 지나치게 절망하거나 교만하지않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내어맡기고, 오늘을 성실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은총가운데 하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죽음마저도 삶의 마지막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괴로움, 슬픔, 절망 또한 밑바닥은 될 수 있을지언정 끝은 아닙니다. 그 사건들은 긴 하느님 섭리의 일부일수 있고, 가까이오라는 초대이거나, 깨어있으라는 메시지 일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33절에서 37절의 짦은 구절 사이에서 3번이나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깨어 있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깨어 있음'의 반대는 '잠들어 있는것' 입니다. 깨어 있음은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반면 잠들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기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내 몸에 관절이 있고, 눈과 귀가 있고, 근육과 피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때는 그 부분이 아프거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할때입니다. 심지어 기도조차 몸으로 하지만, 우리는 평소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모를때가 많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눈앞의 급한 일들이나 해묵은 미움과 집착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이 취한줄을 모르고, 가장 문제 많은 사람은 자기 문제에 눈감고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정작 자기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는 사람들이고, 남의 죄를 단죄하는 데는 능하지만 정작 자기 죄를 성찰하는 데에는 게으름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기가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문제아들이고,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병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방법중에 하나는 일상의 불편함을 깨어 있기위한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괴로운 일들, 불편한 몸과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시시각각 알게되는 일이고,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이 그리 넓고 깊지 않다는 사실과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생긴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아간다는 뜻이고, 죄의식으로 괴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편함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편리함과 안락함에 젖어있다보면 우리의 눈은 어두워지고, 정신은 잠들게 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신이 보낸 등애(Gadfly)" 라고 했습니다. 등애나 쇠파리는 소나 말등을 귀찮게 하는 곤충입니다. 그는 아테네를 잠자고 싶고, 자기 마음대로 지내려는 소나 말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들을 잠들지 못하도록 불편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종종 진실은 불편하고, 우리는 그것은 보려하려 하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내가 틀렸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기 보다는, 눈감고 자신이 옳다는 편한 기분안에 머물고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기도하고, 자선을 행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통해서 나를 알고,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온전히 깨어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