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독서 이사야 40,1-5.9-10.
제 2 독서 베드로 2서 3,8-14.
복 음 마태 1,1-8.
주위를 둘러보면 세월의 흐름에 민감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고, 노인들은 시간을 잊고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젊은이들은 졸업, 취업, 결혼이나 육아 등으로 삶의 변화를 시시각각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한편 세월의 흐름을 충격으로 느끼게 되는 쪽은 노인입니다. 노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엇인가를 잃어가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노인이 시간을 맞이하는 모습은 담담하면서도, 쓸쓸하게 보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서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꿈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의 계획을 만족스럽게 성취했느냐 못했느냐에 관계없이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긴 방향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 무엇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을 꼭 지키고 싶은지에 관한 성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성공과 실패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인생은 '실패'입니다. 가난한 목수 출신에 지위나 재산도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에는 사형수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생애는 성공과 실패의 흔한 잣대로 평가할수 없는 특별한 삶이었습니다. 그분의 '실패'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진정 성공이나 실패로 간주하고 있는지, 그 잣대가 과연 모든 사람에게 들어 맞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운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 준비 중에 하나가 자기 삶을 성찰하는 것, 그분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다른 말로 '회개' 입니다. 흔히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오시면,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집안을 청소하고,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장만합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창세기 18장에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일어난 일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낯선 사람을 보자 그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인사합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종을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요…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도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18, 3-4.5). 성서에서 '낯선 사람'은 처음 본 사람이라는 뜻뿐 아니라 '살해가 가능한 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가족과 친족을 통해서만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던 시대에, '낯선 사람'은 언제든지 강도나 적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낯선 이를 맞아들이고 대접해서,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 거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거룩'이라는 의미를 지난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의 본래 의미는 '다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거룩하시다'고 환호하는 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낯선 분, 나와 전혀 다른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낯선 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자리를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잘못이나 죄라고 생각하지 않은 말과 행위는 없는지, 이제 내려놓아도 좋을 해묵은 감정과 상처는 없는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자주 무례하고 성냈던 사람들은 없는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맛과 향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반대로 우리 삶은 자칫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지고, 옛날에 매여 현재를 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삶도 잘 무르익기 위해서, 익숙하고 묵은 것을 떨쳐내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성찰과 반성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떠 올리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 개선하는 괴로운 과정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ai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친짓이란, 매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Insanity a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물론 우리의 삶은, 그래서 죄 또한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되풀이되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린아이는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워갑니다. 넘어지고 주저앉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하고, 일어서는 것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멈추어야 하는지, 무엇을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그리고 그 결심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지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 환호송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것은 수천년 전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포되었던 복음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선포되었지만, 그만큼 외면당했던 복음이 아닐까요? 그분이 오시고 모든 이가 구원을 보리라는 외침은 간절하게 시대를 거쳐 울려퍼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무디어진 채로 오늘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 말씀을 자주 들어서 내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은 잘 알지만, 그분이 항상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은 외면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공과 번영을 청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생애는 가난했음을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도움을 청하지만 그분이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길을 걷는 데에는 무관심합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메마른곳, 내가 외롭고 무기력하게 되는 곳, 은총과 위안을 느끼기 어려운 곳입니다. 다른 한편 삶의 거추장스런 것이 모두 떨어져 나가서 하느님의 섭리를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노예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도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삶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 보다는 비옥한 땅이나, 사람과 사건이 많은 도시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내가 초라하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땅과 도시위에 성공의 길, 나의 길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통해서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그 걸음보다 더 서둘러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새로운 결심과 노력으로 그분이 오시는 그 길을 마련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