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대림 4주일
제 1 독서      사무엘 하 7,1-5.8ㄷ-12.14ㄱ.16.제 2 독서      로마 16,25-27.복     음      루카 1,26-38.
다음은 시인 류시화 씨의 페이스북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그는 한 여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아마비에 걸린 소녀가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짧고 가늘어서 학교에서는 절름발이라고 따돌림당했으며, 절뚝거릴수록 척추와 골반이 틀어졌다. 사진작가이자 간질환자인 아버지는 장애 가진 딸을 이해하고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체력을 키울 수 있게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수영, 권투, 레슬링도 시켰다. 또 인화와 보정 등 사진술을 가르쳤다. 소녀는 공부를 잘해 엘리트 코스인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의대 진학을 준비하던 졸업반 때, 타고 가던 목제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다. 철제봉이 그녀의 골반을 관통했으며, 갈비뼈와 빗장뼈도 부러지고 이미 약해져 있던 오른쪽 다리뼈는 열 조각으로 부서졌다. 퇴원 후 치료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지만, 척추뼈 3개가 어긋난 것이 뒤늦게 밝혀져 허리 깁스를 하고 몇 달 동안 침대에 갇혀 지냈다. 고통과 후유증이 이어져 친구들은 그녀를 '산 송장'이라 불렀다. 의사가 못 되는 대신 의료용 삽화가라도 되기 위해 침대에 이젤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젤에 거울을 붙여놓고 시험 삼아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통증을 잊는 좋은 방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화상 연작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퇴원 후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진지하게 그림 작업을 해 나갔다. 비극적인 사고가 그녀의 소명을 일깨운 것이다. 스물두 살에 그녀는 스무 살 연상의 유명한 화가와 결혼했다. 나이뿐 아니라 몸무게도 100kg 가까이 차이가 나서 어머니는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라며 반대했다. 결혼하고 보니 남자에게는 이미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버스사고 이후 또 다른 비극적 충돌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유명한 화가 남편의 아내로만 세상에 알려졌으나 세 번의 유산, 괴사한 발가락 절단, 자유분방한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이혼 후 재결합 등 모든 고통과 삶의 의지를 화폭에 담으며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화단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일이 나에게는 초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했다. 악화한 척추를 지탱하기 위해 쇠와 가죽으로 된 28개의 지지대를 몸에 묶고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손의 감염, 다리 괴사, 매독이 겹쳤다. 30대 후반에는 계속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골수이식 수술은 세균 감염이라는 부작용을 나았고 수술이 반복되었다. 그녀의 임박한 죽음을 알아차린 한 사진작가가 그녀를 위해 조국 멕시코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아무리 편하고 쉬워 보이는 삶도 남모르는 고통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자기의 고통만을 보며 살아갑니다. 남들은 나의 삶보다 더 쉬워 보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들에게서 위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는 묘한 안도감 때문이고,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용기와 감사 때문입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종교는 아마도 행복과 성공, 풍요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신화는 빈곤을 극복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한 이들의 영웅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보다는 그들처럼 되기를 원하고, 복음에서 감동하기보다는 그들의 성공담에 매력을 느낍니다. 삶의 고단함이 모두 없어지고 난 후에야 행복하고, 모든 고통이 사라져야 성공하는 거라는 환상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피할 수 있는 고통도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어서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눈이 있어서 멋진 광경을 볼 수 있고, 귀가 있어서 들을 수 있고, 혀가 있어서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 때문에 병들고 늙어 갑니다. 우리는 몸이 주는 기쁨과 함께 그 고통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합니다. 인간관계도 그러하고, 소유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질수록 우리가 관리하고 가꾸어야 하는 대상 또한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서 고통 없이 살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모든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처럼 세상과 우리를 구원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고통을 없애거나 극복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 안음으로써 구원을 이루신 분입니다. 이 점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 또한 비슷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시메온의 예언처럼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루카 2, 35)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과 구원은 그 고난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힘없는 여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성모님은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매일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안으며 살아가는 작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오십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부유한 삶, 고통 없는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은 그 반대편에서 오십니다. 마리아에게 은총이 주어졌지만, 그녀의 고통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고뇌와 괴로움이 생겨났고, 평생토록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되는 은총만을 생각하지만,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총은 다른 것이 아닐까요? 앞서 소개한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처럼 고통은 우리의 영혼과 몸을 부수고,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녀가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작고 허약한 육신으로 매일매일 그 고통을 겪어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억하는 마리아도 그러했고,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고통의 자리에서, 선한 의지로 묵묵히 겪어내는 괴로움과 슬픔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곳은 내가 초라해지고, 아파하는 그 자리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함께하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보아줄 수 있는 밝은 눈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이 내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의 고통의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행동과 말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기보다는 그가 겪어야 했을 번민과 괴로움을 알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고통을 통해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의 슬픔을 통해 세상의 슬픈 이들과 함께하는 대림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