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일 연중 26주일
제 1 독서 에제키엘 18,25-28.
제 2 독서 필리피 2,1-11.
복 음 마태21,28-32.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26주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추석 명절을 앞당겨 지내고 있습니다. 보통 때는 타국땅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을 맞이하면서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함께 송편을 준비하고, 소박하게 준비한 차례를 지내면서 명절을 기억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고, 나라는 존재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는 차례를 지내면서 산 이와 죽은 이가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고, 살아있음을 축하하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몸은 낯선 땅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둘 곳, 영혼이 머물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비록 풍족하고 여유로운 이곳에서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이곳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새로운 기회와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이곳에 머물기는 하지만, 이곳의 말은 우리 영혼에 와 닿지 않고, 이곳의 음식은 우리의 아쉬움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보다 나아 보이는 다른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마음 둘 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뜨내기로 살고 있습니다.
신학교 부제 과정 중 교수신부님께서 하신 질문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본당은?" 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또는 직장인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는?"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신자 수가 많은 본당' 이나 '재정 여건이 좋은 본당' 등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말씀하신 해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러분이 본당신부로 살아가는 그 본당!"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이 오랜 연륜에서 나온 소중한 충고로 여기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자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가꾸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흔히 여기보다 더 좋아 보이는 곳, 이 사람보다 더 좋은 친구, 이웃, 교회 등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돌보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저 세상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더 좋은 조건이 채워지고, 더 나은 사람이 모인 후에야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하느님께 의탁하고, 내가 머무르는 이곳을 가장 좋은 곳으로 여기며, 뿌리는 내리고 가꾸어 가는 것이 천국을 이루는 마음일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빌론을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유배 생활을 하며, 낯선 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시름에 잠겨있었습니다. 시편 137편에 나와 있는 구절에서 그들의 괴로운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 1-2.4) 이렇게 고향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이들에게 예레미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모든 유배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지어 정착하고, 과수원도 만들어 그 열매를 따 먹어라. 아내를 맞아들여 아들 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을 장가보내고 너희 딸들을 시집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고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한, 너희는 그곳에서 그 성읍의 평화를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여라. 너희의 평화가 그 성읍의 평화에 달려있다. (예레미야 14,4-8)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힘쓰고,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잃지 말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편지는 타국 땅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 정착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번창하라고 권고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추석 명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따뜻한 위로를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타향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설움으로 아파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두커니 앉아만 있지 말고, 이곳에서 씩씩하게 행복을 일구며 살아가라는 권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음 하나를 던지십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한 아들과 가겠다고 하고서는 일하지 않은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냐는 물음입니다. 하얀 새 신발을 신고 외출했을 때, 행여 흙탕물이 튈까 봐 조심조심 발걸음을 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두 개 얼룩이 생기면 조심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함부로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이렇듯 처음에는 티 하나 없이 작은 잘못 없이 살려고 노력하다가, 한두 가지의 흠이나 실패로 그 온 전함이 없어졌다 싶으면 스스로 거의 모두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주일미사에 한 번 빠지는 것이 결국에는 서너 번, 서너 달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 30분만 쉬다가 공부하려던 계획이 한두 시간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루를 공치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길을 잘못 들었던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왕 들어선 길 끝까지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더 걸은 만큼, 더 길게 걸어서 되돌아 나와야만 했습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잘못 든 길이어도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더 걸어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되돌아올 길만 스스로 길게 만드는 꼴이었습니다. 교회 격언에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들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거나, 그 영혼이 작은 때도 묻지 않았거나,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없이 넘어지면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던 이들이고, 자신의 한계와 영혼의 어둠에 괴로워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잘못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에게는 뉘우칠 수 있는 용기도 있고, 그 잘못을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는 지혜도 있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음표 하나를 틀려서 노래 전체를 망칠 수도 있고, 잘못된 걸음 하나가 춤 전체를 실패작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죄가 우리 영혼 전체를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잘못 걸어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때는 잘못 말했다 하더라도, 지금 바른 행동으로 그 말을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약간의 얼룩이 생겼다고 전체를 함부로 취급하고, 완벽하지 못하다고 삶 전체를 값싸게 여기는 결벽주의를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음매도 없고, 얼룩 하나 없는 완벽한 하얀색 보자기 같은 삶을 바랍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은 색깔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조각들을 이어붙인 조각보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하루하루는 제각각 이어서 그리 완벽하지도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 부족한 조각들이 모이고 붙여져서 세상에서 유일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과거에 물들지 않고, 항상 지금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