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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부터 우리는 4주간 예수님의 강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미 태어나셨고, 사시다가 당신의 원래 고향에 가 계십니다.

대림 4주 동안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의 새로운 인생,

우리들 각자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 인간의 계산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다릅니다.

 

늘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계산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느낍니다.

유명한 라틴어 격언에 사람이 계획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루신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이 지혜를 짜내서 ‘이보다 더 완벽한 계획은 없다~’

하고 어떤 일을 시작하다 보면 늘 그것이 밑바닥부터 부서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계획은 항상 허점투성이고 늘 모래 위에 세울 때가 많기

때문에 허물어지는 그 집에 대한 고통을 막기 위해 어떨 때는

미리미리 허물고 당신이 직접 목수가 되셔서 집을 지으실 때가 있습니다.

 

피정 요청을 받고 강론 준비를 열심히 해 갔지만 막상 가서는 강의록

한 장 넘기지도 못하고 6~7시간 딴 얘기만 하다 올 때가 있습니다.

그곳을 떠날 때 본당신부님께 미안한 마음에

“신부님, 미안합니다. 준비는 다 해 왔지만 지정된 주제를 이야기 하지

못하고 딴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 신부님이 뭐라고 그러느냐.

“신부님, 여기 오시기 전에 우리 본당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어쩌면 우리 본당과 딱 맞는 이야기만 하십니까?

 

내가 열심히 강론을 준비해도 그분께서 사제의 입을 통해서 하실 말이

있으실 때는 내가 원하던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만큼은 항상 선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28년 동안 사제생활을 하면서 전 한 번도 순탄하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사고 난 곳에 가서 늘 뒤치다꺼리하다가 끝내고

성당을 몇 개씩 지으면서 늘 힘들었고, 그래서 기도합니다.

‘제가 전생에 보속할 것이 얼마나 많기에 다른 신부님들처럼 편하게

본당생활 한 번 못하게 하십니까?‘

그분은 그 기도,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이 김신부의 뜻은 다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가 있고, 내가 워하는 때가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의 계산대로, 자기의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은총은 계산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손익계산을 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외롭고

세월이 갈수록 신앙생활이 더 고달파집니다.

 

오늘 1독서 2독서의 중요한 테마는 시간, 때입니다.

기다림의 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FM 라디오를 깨끗이 들으려면 주파수를 잘 맞추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잘 들으려면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대개 네 가지 정도의 영적인 주파수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지금이 어느 때, 어느 시간이라고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첫 번째, 양심이라고 하는 주파수가 있습니다.

신자든 아니든 세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고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양심이라고 하는 주파수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면서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알려주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이라고 하는 주파수가 있습니다.

성서 말씀을 듣다가 분별이 됩니다.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어지럽고 복잡했던 일들이 정리가 됩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지금이 어느 때 라고 알려주셔서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세 번째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주파수는

대개 고통스런 사건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야 말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찬미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만 평탄할 때에는 대체로 하느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사건 중에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립니다.

 

네 번째 하느님의 가장 강력한 목소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옵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크기가 다르고 길이가 다르고 무게가 다릅니다.

사람 때문에 당하는 십자가가 있고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 당하는 십자가가 있고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고통이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자기 성격이 십자가일 때가 있고

늘 죄짓는 입이 십자가일 때가 있고

골골하는 몸뚱아리가 십자가일 때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지금이 무슨 때인지 알려주는 목소리입니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3장의 말씀처럼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예민하게 듣고 그 때를 알아야 합니다.

사업이나 장사도 공부도 그 때를 놓치면 힘이 들듯이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2독서에서 깨어날 때가 왔다고 바오로사도가 외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성서를 읽고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 인생을

살아간 대표적이 사람입니다. 마니교에 빠져서 인생의 행복은

오로지 쾌락에 있다고 하며 온갖 탐욕적인 생활을 다 했습니다.

16세에 가정부를 임신시키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짠물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갈증이 심해서 물을 켜듯이

그런 생활을 할수록 영혼은 허전하고 삶은 더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번민과 몸부림 끝에 우연히 ‘집어서 읽어라!’ 하는 영적인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그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자기 어머니가 보는 성서 책을 들쳐보니

바로 그 유명한 바오로 서간, 로마서 13장 13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번민과 눈물 속에서 몹시도 괴로워하던 아오스딩은

이 대목에서 크나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참다운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는 것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때를 만난 겁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만났을 때가 있습니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행동이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글라라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나쁜 마음을 먹고 그 뒤를 따라갔으나 글라라가 산 속에 있는

나병환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려 열어보니 웬 사람이

오들오들 떨면서 몸을 좀 녹이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들어오게 하여 벽난로에 불을 붙이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고름이 줄줄 흐르는 나병환자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멱살을 잡아서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하며 내쫓았겠지만 회개한 직후라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서 악취가 나서 보니

그 문둥이가 침대로 기어들어와 있는 겁니다.

다른 때 같으면 주먹으로 쳤겠지만 착하게 살려고 마음먹은 직후라 그 문둥이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온 방안에 장미향기가 가득하여 둘러보니

침대 위에 성부 성자 성령을 나타내는 장미꽃 세 송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밤에 같이 있었던 그 나병환자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미 세 송이를 들고 엉엉 울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 죄인과 같이 동침을 하셨군요. 어젯밤 주님을

발로 차고 멱살을 잡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가 완덕으로 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위대한 물리학자요, 철학자이며 신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났던 그 시간을 잊지를 못해서 양피지에다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이 죄인 파스칼의

하느님을 나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만났노라!’

라고 써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파스칼은 하느님을 만났던 그때를 늘 상기하면서

흔들리는 신앙을 되잡을 수 있었다고 그럽니다.

 

세례 받고 나서 하느님을 가슴 뜨겁게 만난 적이 있었던가!

어떤 분은 꾸르실료 가서 하느님을 체험할 때가 있고

어떤 분은 성령세미나 안수 받을 때 하느님을 체험할 때가 있고

어떤 분은 피정을 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때도 있고

어떤 분은 고통의 끝까지 가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명심할 것은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의 계산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의 목소리와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신앙인이고

내 뜻에다가 하느님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종교인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원하실 때 불쑥 찾아오시는 것

그게 바로 주님의 재림입니다.

깨어 준비하며 대림절을 잘 보내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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