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선교사 복자 샤를 드 푸코


사하라 사막의 선교사로서 예수님의 충실한 종으로 사신 샤를르 드 푸코(1858-1916년) 신부님은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사막의 선교사 샤를르 드 푸코 신부를 복자품에 올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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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형제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인상적인 삶! 비범한 인격! 샤를르 드 푸코는 아주 유서 깊은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의 방탕한 장교였고, 아프리카 탐험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철저한 회심 이후, 사제가 되어 사하라 시막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적 지도자요, 영신적 아버지로 모신다. 그는 자신과 우리에게 이 한 가지만을 원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모든 사람들을 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언에서 우리에게 진심어린 요청을 한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도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면 어떤 고난도 당신에게 장애가 되지 못한다.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라! 그들이 당신에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당신도 그들에게 그렇게 행하라!"

 


외로운 소년

 

1858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샤를르는 엘자쓰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5살 때 5개월 간격으로 부모를 차례로 잃었다. 그 당시 여동생 마리는 3살이었다. 소년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주님,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소서!"

 

훗날 그는 이렇게 쓴다.

 

"오 주님, 저는 거룩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어머니를 통해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흠숭할 것을 제게 가르쳤습니다."

 

14살 때, 샤를르는 경건하게 첫 영성체를 받았다. 그러나 곧 "그릇된 사조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히 신앙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부정할 것도, 믿을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12년을 살았다. 진리에 대해 의심하고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어떤 증거도 확실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은 점점 게을러지고 살이 쪘다. 간신히 김나지움에 합격한 그는 아무런 목표도 없이 공허하고 무관심한 가운데 파리의 한 예수회 학교에서 군인이 될 준비를 했다."17살의 나는 신앙심도 없고, 이기주의와 그릇된 욕망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사치스러운 젊은 백작

 

그는 18세 때, 유명한 사관학교에 들어가 2년을 보냈다. 20세가 되어 성년이 되고 젊은 백작이 된 그는 대단히 큰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곧 기병 학교로 옮겼다. 그는 기품있어 보이고 교육도 잘 받았으나 경박하였고 오로지 즐겁게 지내는 일에만 마음을 썼다. 맛있는 포도주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포도주를 모두 사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 백작의 내적인 가난을 알 것인가? "그 당시 나는 고통스러운 공허감, 비애, 그런 것만을 느꼈다. 밤에 혼자 내 방에 있으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찾아들었다."

 

1880년 말, 그가 속한 연대는 알제리로 배치되었다. 샤를르에게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는 애인인 미미를 데리고 갔고 아무 거리낌 없이 어디든지 부인처럼 데리고 다녔다. 결국 그는 '부도덕한 행동과 계속된 방탕한 생활'로 연대에서 쫓겨났고, 1881년 3월 미미와 함께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밀려드는 공허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던 그는 공허감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화려한 생활에 탐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연대가 알제리 남 오랑의 큰 전투에 휘말려 들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된 그는 그들을 돕기 위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서둘러 그곳으로 떠났다. 그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으나 ' 이 방탕아는 위험과 힘든 생활 속에서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는 가장 힘든 일을 기꺼이 떠맡았고, 온 힘을 다해 부하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모로코의 요셉 알레망

 

아프리카의 모로코는, 특히 시막은 샤를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어떤 유럽인도 그때까지 가보지 못했던 모로코를 향해 탐험 여행을 떠났다. 그는 랍비 요셉 알레망으로 변장하고 실제로 일 년 동안 모로코를 두루 여행했다. 극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록한 정확하고 학문적인 그의 저술은 프랑스 지리학계의 금메달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갑자기 그는 탐험가요, 학자로서 축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사촌 카스트리에게 이렇게 썼다. "이슬람은 내 안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 사람들과 이들의 신앙을 바라보는 것은 내게 아주 위대한 어떤 것을, 이 세상을 움직이는 많은 진리를 깨닫게 했다."

 


무릎을 꿇으시오!

 

1886년 10월, 28세의 젊은 청년은 '하느님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교회(성당)에서 여러 시간 동안 아주 경건하게 기도를 바쳤다.

 

"하느님, 당신께서 계시다면 제가 당신을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10월 30일, 샤를르는 유블랑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성 오귀스탱 성당을 찾아가 고백소로 들어갔다. 이 거룩하고 친절한 사제는 젊은이에게 단순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었다. "무릎을 꿇고 고백을 하시오!" 잠시 후 사제는 그에게 성체를 영해주었다. 푸코의 회심은 철저하고 무조건적이었다.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자마자 내게 분명해진 사실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888년 샤를르가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세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므로 일찍이 그 어떤 인간도 그보다 더 내려갈 수는 없다."는 유블랑 신부의 강론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언제나 가장 높은 자리를 추구해왔던 샤를르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제 그는 평생 '일등석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장 미천한 자들 속에서 살기로 했다. 두 번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은 성지 순례를 갔을 때였다. 예루살렘 성지를 3개월간 여행하면서 그는 나자렛 예수의 삶처럼 눈에 띄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다.

 


마리 알베리끄 수사

 

그는 나이제리아 노틀담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0년 1월 15일, 샤를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에 마리 알베리끄 수사로 입회했다.

 

"내 모든 행복인 가족을 영원히 떠나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살다 죽겠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희생이었다. 그것은 내게 끊임없는 희생이 되었고 내 모든 눈물을 다 쏟게 했다. 추위나 굶주림이나 단식은 희생 축에도 못 들었다."

 

6개월 후, 샤를르는 자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시리아의 아크베스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은 광신적인 이슬람교도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시골 농부들이 하는 아주 힘든 일'을 하면서 지냈는데 책을 통해 자신과 매우 비슷한 성격의 불같은 영혼을 가진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알게 되었다. 성녀는 그에게 영신적 누이가 되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라는 성녀의 가르침을 샤를르는 죽는 날까지 매일 일기장에 썼다. 곧 마리 알베르끄 수사는 영적 지도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내가 여기서 만족할 만한 가난을 발견했기를 바라지요. 아닙니다. 부자들이 볼 때 우리는 아주 가난하지만 우리 주님만큼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자렛 예수의 삶을 살도록 불러주신 것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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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의 머슴

 

1897년 3월, "샤를르 수사"는, 이제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는데, '마리아, 요셉, 사도 그리고 목자들처럼 가난한 일꾼으로 일하기 위하여' 동양인 복장을 하고 걸어서 나자렛에 도착했다. 3년간 클라라 수녀원에서 살기 위해서였다. 전에는 백작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나는 미사와 전례에 봉사하고 교회(성당)와 마당을 청소하고 장을 보고 사람들이 내게 부탁하는 모든 일을한다." 


그는 거리의 장난꾸러기들이 돌을 던져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또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보냈지만 무미건조함과 혼란스러움이 들끓었다. 성체성사, 염경기도, 묵상기도,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다 어렵다. 모든 것이 다!"

 


사제가 없는 곳으로

 

샤를르는 1901년 6월 9일 프랑스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올 성지에서 나자렛의 생활을 할 게 아니라 병들고 아무 도움도 받을 길 없는 사람들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제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식사를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가톨릭) 교회의 허락을 얻어 알제리로 가서 '문을 활짝 열어둔 은수자'로서 돌멩이와 모래 사막으로 둘러싸인 사하라의 중요한 오아시스인 베니압베스에 정착했다. "착한 마라부"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할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소문이 처음부터 급속히 퍼져나갔다. 마라부는 목자라는 뜻이다. 샤를르는 곧 수많은 노예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프랑스 관할당국에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양들을 위험 속에 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쁜 목자가 되지도 않겠고 무능한 양치기 개도 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힘을 다해 과 싸워야 합니다."

 

그는 마리에게 이렇게 썼다. "수많은 노예들을 되사는 일은 내 지갑을 바닥나게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다른 노예들을 되사라고 부탁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주인의 손에 그냥 놔둘 때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받아들이겠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친구든 적이든, 이슬람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나는 거룩한 희생 제물인 성체의 현존을 통해, 기도와 보속과 이웃 사랑을 통해 복음을 전하겠다. 마지막 빵 한 조각까지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찾아오는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과 함께 나누겠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겠다."

 


벌집

 

1902년 그는 전교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잠시도 책을 읽거나 묵상할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바깥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병사들이 끊임없이 나를 찾아옵니다. 매일 20명의 노예들이 그들을 위해 세운 작은 집을 채웁니다. 30명에서 40명에 이르는 방문객들이 여기에 옵니다. 15명분의 약을 나누어주는데 걸인들이 75명에 이를 때도 있고, 어린이가 60명에 달할 때도 있습니다. 매일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제공받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이 집은 비어 있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형제의 집'은 마치 벌집과도 같습니다."

 

"그의 사랑은 끝을 몰랐다. 샤를르 신부는 모든 병사들과 장교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신'형제들로 영접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교를 할 때라도 부자들을 제외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언젠가 대단히 열악한 군병원에 100명의 부상당한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샤를르 신부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그들은 처음에는 휘파람을 불고 상스런 노래를 불러대며 그를 대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조용한 간병인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재밌는 사제'를 기다리게 되었다. 3주 후에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거의 모두가 미사에 참례했고 어떤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셨다.

 

1902년 말, 또 다른 것이 이 사제의 마음을 빼앗았다.

 

"온 모로코에 얼마나 깊은 밤과 얼마나 큰 슬픔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가! 사제도 없고 감실도 없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마음 하나 없다니!"

 

그는 기꺼이 갈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른 것을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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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레그에서

 

1904년 샤를르 신부는 선교사로서 사하라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마리에게 이렇게 썼다. "한 원주민이 나에게 '압드 이사, 예수의 종'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행군 대열 중 한 명은 이렇게 보고한다.

 

"아침 5시부터 기온이 섭씨 40도에서 50도를 넘나든다. 낮에는 8리터에서 1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행군 2시간 후쯤이면 모두들 말을 타고 있다. 그러나 신부님은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굴리면서 완전히 지칠 때까지 언제나 빠른 속도로 걸어서 따라왔다. 우리들 중 한 명이 '신부님께서 말을 타지 않으시면 저도 내려가서 걷겠어요.'라고 말하자, 신부님은 그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없어 웃으면서 그 고난의 길을 포기했다."

 

샤를르 신부는 남 알제리 여행에서 처음으로 투아레그족을 만났다. 그들은 회교(이슬람교)를 믿는 유목민들이었고 순수 혈통의 바르바리인이며 산악지대 호가르 지역의 지배자였다. 그들의 기품있는 얼굴과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종'은 1905년부터 11년 동안 그들과 함께 '원주민'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죽게 된다. '주님께서 살던 시절의 나자렛이나 베들레헴 같은' 타망라셋에 그는 진흙과 짚으로 두 개의 오두막집을 지었다. "투아레그족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무식하긴 하지만 호기심이 많다. 그들은 우리를 '이교도'라 부르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과 섞여 지내야 했다."

 


빛을 주는 등불

 

"여기 이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열의에 불타는 '예수의 종'은 탄식하며, 자신의 노트에 적어놓은 대로 "사제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성광과 같다."라는 말을 실행했다.

 

"내 사도직은 자비와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사도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이 사람이 아주 선하므로 그의 종교도 틀림없이 선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이 왜 내가 그렇게 온유하고 선하게 행동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착한 사람의 종이니까. 당신들이 내 주인인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안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고 멀리 떨어져 있는 영혼들이 '선하신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할 수 있을 텐데!"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복음 선교사에게는 모든 수단이 다 옳다. 마리는 샤를르 신부가 원하는 대로 그가 '가난한 수단'이라고 즐겨 부르던 것을 보내주었다.


"나무로 만든 아주 단순한 묵주 20개, 끝에 메달이 달리고 십자가가 없는 것으로. 왜냐하면 회교도(이슬람교도)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것이므로 작은 묵주알에서는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가르치고, 큰 묵주알에서는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라고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샤를르 신부는 오랫동안 투아레그족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한 덕분에 "그는 우리말을 우리보다 더 잘 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앞으로 올 선교사들이 쉽게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시를 2,000개 이상 모으고 11년 동안 연구하여 사전을 만들었다.

 


혼자서

 

1907년 여름, 지칠대로 지친 샤를르 신부는 사촌 누나에게 편지를 쓴다.

 

"17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나이를 실감합니다. ... 나는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자신의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미사를 드릴 수 없다. 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비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누군가 오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 여행자도, 한 명의 군인도, 혼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허가도 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처음으로 성탄 전야 미사를 드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쓰러졌다.

 

"하루, 이틀,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샤를르 신부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투아레그인 친구들이 이 끔찍한 가뭄 탓에 젖이 나오지 않는 염소들을 다 찾아다니면서 이 '마라부(목자)'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1910년 샤를르 신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셋을 잃었다. 그는 37세의 전교 주교 몬시뇰 게랑과 가장 친한 친구인 라크루아 중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같은 날 듣는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영적 지도자 유블랑 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결국 이 은수자는 얼마 안 있어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외로움이 점점 커진다. 그렇다. 나는 혼자다. 그래도 예수님은 계신다."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제를. 일에 익숙하고 계속해낼 수 있으며 나보다 더 잘 해내는"

 

그런 동반자를 그는 얼마나 열심히 바랐던가!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은 밀알과도 같다. 나는 혼자니까! 내가 죽어서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달라. 나는 미래의 수확을 준비하기 위하여 복음서의 밀알처럼 사하라의 땅에서 썩어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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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1916년 초, 샤를르 신부는 친척들에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유머로 편지를 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나는 죽을 만큼 일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더 이상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방문객이 많아서 생각지도 않은 여유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전보다 더 많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복음 말씀 중에 이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고, 내 삶을 변화시킨 것은 없다!"

 

기도하는 이 위대한 사람은 이즈음 때로 '구세주가 된다는 것'에 대한 명상에 잠겼다.

 

"마리아는 걸음을 서둘러 산골로 찾아갔다. ... 예수님으로 채워진 자는 사랑으로 채워진 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다가가셨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하려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는 일본의 순교자들에 대해 읽은 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가능한 한 많이 일할 것."

"그렇다, 일하고 기도하고 고통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세 가지 방법이다!"

"나는 내가 죽길 원한다고 고집할 수가 없다. 전에는 죽음을 동경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야 할 선행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목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다."



오늘 밤은 순교자의 죽음을 맞을 것처럼 그렇게 살아라!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하라 사막도 소요와 반란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예수의 종은 자신의 오두막집을 작은 요새이자 피난처로 바꾸었다. 그는 말한다.


"오늘 밤 순교자의 죽음을 맞을 것처럼 그렇게 살아라!" 


그리고 12월 1일, 58세의 그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40명의 광신적 세누시스교도인 폭도들이 오두막집을 습격했다. 그들 중에는 샤를르 신부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 투아레그인이 있었다. 그 배신자는 우편 배달부인 척했고 사제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거칠게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손을 등 뒤로 돌려 단단히 묶었다. 그의 오두막집이 약탈되는 동안 그렇게 웅크린 자세로 선교사는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때 군인이 나타나자 흥분한 폭도 하나가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모래 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3주 후, 사람들은 착한 선교사의 시신이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의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성체가 든 그의 초라한 성광을 찾아냈다. 폭도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지만, 만인의 형제가 이렇게 기도했던 것을 안다면 잃어버릴 뻔했던 성광을 찾은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주님의 제스처인가?

 

"오 예수님, 당신을 모른 채 당신 주위에 있는 민족들 위에 이 감실로 부터 빛을 보내소서!"

 

"나는 내가 죽은 곳에 묻히고 싶다. 그곳에서 부활할 때까지 조용히 쉬고 싶다."

 

군인들이 위대한 선교사가 죽임을 당한 곳에 도착했을 때 그의 무덤엔 이 '작은 형제'가 원한 대로 이름도 없이 나무 십자가만이 있었다. 1929년, 그의 시신은 타망랏세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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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싹트다

 

'예수의 작은 형제'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결실도 없었다. 그러나 이 선교사며 수도자의 완전한 헌신은 그의 영적 가족들 안에서, 적어도 18개 이상의 다른 공동체 안에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다.


1933년, 사하라에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세워졌다. 작은 형제회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세상에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순한 일꾼으로서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샤를르 신부의 영성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또 그와는 완전히 별도로 남 프랑스의 젊은 여교사가 1939년 사하라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를 세웠다. 설립자인 예수의 작은 자매, 막다레나 수녀(1898-1989)는 말한다.

 

"설립 역사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내 손을 잡으셨고 나는 그분을 맹목적으로 따라갔다. 나는 언제나 아팠기 때문에 내 안에서 미래 수도회 설립자의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나를 아주 어려서부터 준비시키셨으니, 아프리카와 모든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내 마음속에 심어주셨던 것이다. 20년의 기다림! 작은 빛줄기가 이 시대를 밝혔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 안에서 나는 내가 꿈꾸어왔던 이상을 찾았다. 복음의 삶을 사는 것, 완전한 겸손,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 무엇보다 충만한 사랑이신 예수님의 사랑! 1939년, 마침내 때가 이르렀다! 나를 치료하던 한 의사가 병의 진행을 막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는 지역, 에를 들면 사하라 같은 곳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내게 말했다."

 

막달레나 수녀는 그곳에서부터 "지상의 모든 곳에 사랑의 불을 지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늙어서까지 알래스카, 아프가니스탄, 칠레, 베트남 등에서 이를 행했다. 오늘날, 65개 나라에서 1,000명에 달하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장애자들 속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본에서는 가장 하층민인 부락민 속에서 설거지하는 사람으로,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발적으로 감옥의 수감자가 되고 유목민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창시자 샤를르 드 푸코 신부의 충고를 소박하게 따른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사랑의 사도직이다."

 

"일요일 아침,

우리들은 샤를르 신부의 오두막집에서

미사를 드렸다.

흔들거리는 건물,

이 오두막집이 성당이었다.

바닥에는 초라한 짚이 깔려있고,

제대는 널빤지였다!

발은 모래 속에 빠지고...

미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나는 푸코 신부가 집전했던 그런 미사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 평생에 가장 큰 감동이었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135호, 독일 'Triumph des Herzens'에서 아베마리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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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신부가 자신의 오두막집에 직접 그린 실물 크기의 예수 성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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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신부가 직접 그린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




샤를 드 푸코의 기도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을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 드릴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 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당신의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제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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