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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품은 보면 볼수록 많은 사람에게 평화스럽고 따뜻한 인상을 주어 명상하는 데 좋은 작품이다.

20대의 젊은 예수님에게 십대 후반인 요한이 몸을 기대고 있다.

마치 절친한 친구에게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의지하고 있는 이 장면은

형님과 아우와 같은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 조각된 두 인물 사이에는 간격이 없이 밀착되어 있어 절친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한의 오른 손바닥은 예수님의 오른 손바닥에 포개어 놓고 있고

예수님의 왼손은 요한의 어깨를 부드럽게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이것은 농도 짙은 영적인 사랑의 교감(交感)에서 나오는 행위이며 신뢰인 것이다.

 

예수님과 요한 두 사람의 복장도 친밀감과 우정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어

부드럽고 평화스런 느낌을 준다.

이 조각품은 원래 수세기 동안 수녀원 명상의 방에 있던 작품이라고 하는데

수녀들에게 이 작품을 통하여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사실 기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는 질문하거나 이야기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기도란 신(神)의 마음에 나의 머리를 기대는 것이며

그 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완전한 복종을 의미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신에 대한 완전한 복종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는데 우선적으로 앞서야 하는 것이다. (글.정지풍 신부)


성 요한 사도(J. Apostolus, ?∼100?).
라틴어  Joannes  영어  John  독일어  Johannes 

12사도의 한 사람. 성인. 갈릴래아의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

장(長)야고보의 동생(마태 4:21,10:2, 마르 1:19, 3:17, 루가 6:14, 사도 1:13).


부르시는 분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응답한다.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의 부르심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아의 부르심과 더불어

복음에서 아주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따라갔다. 그들 응답의 절대성은 그 이야기가 가르쳐 준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손질하며 그들 아버지의 배에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세 사람의 전직 어부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러한 신앙은

그들에게 베푼 예수님의 특별한 우정으로 보상받게 된다.

그들만이 예수의 얼굴 모습이 변하는 장소에 있었으며,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보았고,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 중에 함께 있는 특전을 누렸다.

그러나 요한의 우정은 한층 더 각별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최후 만찬에서 예수께 기대고 있던 사람, 그리고

그가 십자가 곁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의 모친을 돌보라고 지고의 영예를 부여 받은 인물이 자신임을 언급한다.

"어머니, 이 사람의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은 그 복음의 심오함 때문에 다른 저술가들이 파고 들어가지 못한 높은 곳을 날아오르는

신학의 독수리로 생각된다.

그러나 가장 솔직한 복음으로 대단히 인간적인 면을 몇 가지 보여 주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을 주셨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지만 두 가지 사건에서 하나의 단서가 있다.

그들은-다른 이야기에서는 그들의 어머니라고 한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그들이 영예로운 자리에 (하나는 그의 오른편에 하나는 그의 왼편에)앉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당신이 받을 고통의 세례를 그들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예, 할 수 있습니다."하고 기꺼이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참으로 당신의 잔을 나눌 수는 있지만

당신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미리 마련하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은 이 형제의 그릇된 야심을 부당하게 여겼고

예수께서는 이것으로 그들에게 참다운 권위의 본질을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셨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또 다른 기회에 ’천둥의 아들들’이 예수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친절한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부활 첫날 막달레나는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그들에게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알려 주었다."

요한은 아마도 미소를 지으면서 이 장면을 회상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려서 그가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요한은 부활 이후에 최초의 큰 기적이 일어났을 때도 베드로와 함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의 앉은뱅이를 고쳐 준 것으로 인해 그들은 감옥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다.

부활의 신비스러운 체험은 아마도 사도행전에 가장 잘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 사도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도 4,13)

 

물론 요한은 그의 위대한 복음,편지들,묵시록으로 매우 잘 알려져있었다.

그의 복음은 대단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는 예수의 인간적인 생활의 여러 사건 안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이미 하늘 나라에 계신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말하는 복음이다.



권력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열심이던 때부터 하늘에서 불을 내리도록 청하며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길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

하고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머나먼 길이었다.

 

지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요한의 설교에

요한의 본당 신자들이 지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가 진실이든 아니든 요한의 글 속에 이야기의 바탕이 있다.

요한은 우리가 성서의 요약이라고 할 만한 것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직하신 사랑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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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복음을 쓴 요한 사도의 상징은 독수리이다.

그 이유는 다른 3명의 복음사가 마태오, 마르코, 루가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해서만 기록한 반면,

성 요한 사도는 홀로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이라는 높은 점을 주안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새보다 더높이 나는 독수리에 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 요한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해 특별히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 성서에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요한 13, 23)고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요한은 이전에 성 요한 세례자의 열심한 제자요,

다른 유다인들과 같이 구세주의 임하심을 하루를 천추와 같이 고대했다.

그런데 하루는 스승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십니다"(요한 1, 29)하고 가리키며

구세주이심을 깨우쳐 주니 요한은 즉시 베드로와 그동생 안드레아와 같이

최초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처음 주님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찾아간 시각도 잊지않고

"때는 이미 오후 네 시경이었다"(요한 1, 39)고 기록했다.



요한은 사도들 중에서도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이 주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분이다.

즉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켰을 때와 타볼 산에서 모습이 변하셨을때에 그 참관자가

위의 세 명이었다는 점으로도 능히 추측된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와같은 각별한 애호에 감사하는 정에서 알뜰히 주님을 사랑하고 받들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동네에서 냉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야고보와 같이 화를 내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 54)하고

극도록 심한 말을 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즉시 책망하시며 "당신들은 어떠한 영에 속해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루가 9, 56)하고

타일러 주셨지만, 그래도 그들의 당신께 대한 사랑의 정은 기꺼이 여겼으리라.

또 이 이야기 외에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네르게스(Boanerges),

즉 천둥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신 일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얼핏 보기에 여성다운 부드러운 인물같은 상상이 들지만

주님께서 "당신들은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하셨을 때에,

그들 형제는 서슴지 않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의 수난이 시작되자 야고보는 실망해 도망쳤고, 베드로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해 큰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사도들도 모두 슬금슬금 다 꽁무니를 빼는 틈에

오직 요한 만은 머물러 있어 성모와 같이 갈바리아 산상에서 예수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산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는 전에 타볼산에서 목격한 바와는 아주 판이한 장면이었다.

참혹하게 된 예수의 비통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털끝만큼도 동정심이 없는 악당들의 조롱하는 소리에 요한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이 구속사업에 필요함을 알았고,

자신도 마음의 고통을 참음으로써 주님과 같이 희생으로 바쳤다.

 

이 같은 충성을 주님께서 등한히 하실리는 만무했다.

주님께서는 그 보답으로 성스러운 성모의 장래를 그에게 맡기셨다.

요한은 이 중임을 얼마나 명예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인가!

그 날부터 그는 성모를 자기 집에 모시고 정성껏 돌봐 드렸다.

그가 저술한 성서가 다른 저자와 그 취지에 있어 매우 차이가 있고,

예수의 신성을 역력히 드러내는 빛나는 주옥편이 된 것은 성령의 감도도 감도려니와,

그가 평소 성모를 곁에 모시고 섬기며 종종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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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는 성 요한 사도


전설에 의하면 성모께서는 유서 깊은 갈바리아를 잠시도 잊지 못하시고 여생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셨는데,

요한은 그녀의 임종 때까지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성모를 섬겼고,

44년 헤로데 아그리파에게 박해를 당해, 사도들이 각국으로 흩어질 때 그도 에페소로 피했으며

그 곳 소아시아의 각 교회,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이아 등 일곱 교회를 지도했다.

 

95년에 제2의 네로라고 불리는 도미시아노의 박해가 시작되자, 요한도 마침내 잡혀 파트모스 섬에

유형 당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이 직접 계시로 붓을 들어 저 유명한 묵시록을 저술했으며

교회의 장래 승리를 예언해 고통을 받는 신자들에게 위안과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96년, 도미시아노가 암살되자 이어 왕위에 오른 넬바는 추방된 신자를 전부 소환했으므로, 요

한도 그리운 에페소의 땅을 다시 디딜 수가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매우 고령이었다. 그러라 유일하게 생존한 사도로서 힘껏 신자들을 가르쳤다.

너무 노쇠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는 신자들에게 부축을 받아 성당에 갔고,

"아들아, 서로 사랑하라!"하며 교훈했다.

한결같이 같은 말만 거듭해 신자들이 싫증을 내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가 그 귀중한 성서를 저술한 것은 1세기 말 경이요, 그노시스 이단 및 예수의 신성에 대해

구구한 이설이 떠돌 때였다.

그래서 그의 저술의 목적은 앞서 말한 그 이설에 대항해 올바른 것을 가르치기 위한,즉

 구세주께서는 위격(位格)으로 하느님이심을 명백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 맡은 사명을 충분히 채운 사도 성 요한은 트라야노 황제 시대에

백 살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 총애 깊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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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요한 1서 주해]에서

(Tract. 1,1.3: PL 35, 1978.1980)

 

생명 자체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말씀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육신이 되신 이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신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할 때 표현하는 대로

말씀의 존재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서간의 말씀은 다음의 복음서 말씀으로 확증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손으로 만져 본 그리스도의 실제 몸이 아니고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을 보고 천상 빵으로 받아 모시는 천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무엇을 또 말합니까?

"마침내 사람들도 천사의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영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어 영혼이 치유되었습니다.

사실 말씀은 영적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의 눈으로도 봅니다.

우리가 육신을 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씀으로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 사가는 또 말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라는 이 말을 좀더 명확히 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사도들은 육신으로 현존하시는 주님 자신을 보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실제로 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듣기는 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사도들보다 덜 복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덜 복된 사람들이라면 복음사가는 다음 말씀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과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가는 다음 말씀으로 끝마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보냅니다."

충만한 기쁨은 바로 이 친교에, 이 사랑에 그리고 이 일치에 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출처:http://blog.daum.net/jerom9401/9770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