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사랑을 받아 들이는 것-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은 거저 베풀어집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신이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 분이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내맡기시고 그분의 품에 안기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자녀로 생각합니다.

당신은 수없이 그분께로부터 도망쳤고 그분의 집보다는 낯선 곳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그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분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과 어렵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 자체가 되심으로써 당신을 알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 분이 되시어 강생을 실현하신 것처럼, 통교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사랑을 통해 통교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당신이 기도를 통해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당신은 그분께 그분 자신을 알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께 당신 영혼의 깨끗한 칠판을 내어 드림으로써 그분께서 그분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그 위에 그리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명백히 규정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우리의 역사 전체의 요약입니다.

기억해 둡시다.

믿지 못하시겠다고요?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슬프시다고요?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기뻐질 것입니다.

혼자시라고요?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고독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옥에 있으시다고요?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천국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차원-


창 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에는 믿음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실례와 믿음에 관한 모든 인간적인 이야기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예, 그리고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의 이러한 서사시적 투쟁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아브람이라 불린 사람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하란에 살았습니다. 그는 데라의 아들로서 사래와 결혼했는데 불행히도 그녀는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었으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 12,1-3)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의 신비이고 바로 이것이 '소명'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믿음의 어둠 속에서 일어나기에 모든 인간적인 추리로는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메세지가 어떻게 아브람에게 감지되었을까요? 요한 23세 교황은 어떻게 14세때에 '너는 사제가 되리라'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우리 각자는 어떻게 우리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을까요?

믿음 곧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믿음이라는 '새로운 차원'에 의해서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이성에서 출발하거나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성과 대립되지는 않을지라도 이성을 무한히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이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 영원하신 분, 곧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이야기합니다.



카를로 카레토의 '보이지 않는 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