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봉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교회에서 성서를 아는 일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서가 신학의 영혼이며 중심인 까닭입니다.

  지난 여름 제가 사는 방주(부산 신학교 영성관 별칭)에서는 교회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할 있는 '아주 특별한 ' 있었습니다. 우리 1학년 신학생들이 '열흘간 성서 통독 피정' 가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께서는 성서 두께(신ㆍ구약 2,430)만으로 하루에 읽어야 하는 분량을 짐작하실 있으실 것입니다.

 첫날 모여든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 이렇게 두꺼우냐?" "글자는 이렇게 작으냐?" 등등…. 어리광서린 투정이 만발했습니다. 찌는 더운 여름, 좋은 방학에 다시 학교에 들어와서 종일 더위와 씨름하며 성서만 읽어야 하는 일이 반가운 일은 아니리라 싶어서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독방을 사용하게 하고, 간식을 골고루 마련하고 해질녘이면 축구를 있다는 약속으로 원성을 덜어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첫날부터 비가 그침 없이 사흘을 퍼붓는 겁니다. 평소에 제가 지닌 확신이 있기는 했지만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첫날을 돌아보는 나눔의 시간에 쏟아졌던 자아비판에 가까운 이야기가 밤을 지내면서 달라지더니, 사흘 되던 날에는 드디어 종일 성서를 읽는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스스로 성서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생기를 얻은 모습이 눈빛에 역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장가 같았던 말씀들이, 잔소리뿐이던 말씀들이 맛나게 차려진 식탁으로 변하고, 종이에 인쇄된 글자가 아니라 역사요, 진리요, 살아있는 말씀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지켜볼 있었던 행복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피정이 '천국'이었노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친구, 성서 읽기를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됐다는 녀석, 참된 제자의 길을 배웠다는 아이와 성서 안에서 달라져 가고 맛있는 열매로 익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고백에 이르기까지 처음 원성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나씩 둘씩 누구에게 전해들은 지식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나고 더듬어 느낀 하느님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통독 피정 후에 제출한 소감을 읽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기쁜 웃음소리를 들은 흥겨웠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전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기꺼이 지겠노라고 결심할 정도로 훌쩍 자라나 있는 우리 학생들은 이제 학년 동안 통독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처럼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서는 윤리신학을 포함한 모든 신학의 바탕이고 영혼입니다. 물론 복음이 윤리교과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윤리적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복음대로 살아온 그리스도인 윤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서학자들 도움으로 신약성서에 드러나는 메시지, 특히 부차적인 역사적 산물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작업은 윤리신학의 몫으로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을 성서에서 만나게 되고 만남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윤리적 결단의 힘을 성서는 제공합니다. 따라서 성서는 윤리신학의 '영양분'입니다. 윤리신학의 기초가 되는 방향과 개념을 성서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기초로 하여 "이것을 해야 하고, 이것은 금지돼 있다" 규범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완덕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 윤리신학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 하느님 말씀을 읽고, 흥분하던 학생들 얼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합니다. 일단 시작하십시오. 성서는 읽는 만큼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감미로운 음성으로 듣게 됩니다. 내일 아침이 오늘보다 나아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성서를 펴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히브 6,1).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