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믿음의 부진과 메마름에서도 그대 영혼을 태양에 맡기십시오! 


그대는 흠숭하는 동안 아마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고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흠숭 시간에 메마름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이미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는 영적 성장의 법칙에 속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좋은 느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기 위한 훌륭한 학교입니다. 

  

기도와 흠숭의 대가였던 바우도인 왕의 진술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그는 자주 자기 경당에 갔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한밤중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부진과 메마름 속에서 하느님을 묵상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견디어 냈습니다. 신앙의 메마름이 그가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을 흠숭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흠숭을 통해 풍성하게 내려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관여하지 않아도, 탁월하게 느끼지 못해도 작용합니다. 

  

바우도인 왕은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영혼을 태양이신 하느님께 내맡기시오. 비록 그대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라도 경당에서 보내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걱정하지 마시오. 햇볕에 그을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인내가 요구되는 법입니다."

  

  그대는 성체 안에 계시는 신적 태양의 광채에 그대 자신을 내맡기십시오. 그대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라도 태양은 빛을 발산합니다. 우리 지구를 비추는 태양과는 달리 그대는 그을음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지상에서 태양의 많은 긍정적 작용들을 직접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가 흠숭 중에 머물러 있는 신적 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적 태양은 그대를 변화시키시고, 그대를 치유하십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수도원에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에 메마름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녀는 자기 자신을 지칠줄 모르게 태양을 바라보는 작은 새에 비유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한 마리 가냘픈 작은 새로 여깁니다. 저는 독수리가 아니지만, 독수리에게서 눈과 마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의 보잘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눈을 팔지 않고 신적 태양을 바라봅니다. 그 새는 대담하게 자신을 내맡기는 가운데 신적 태양의 시선에 잠겨 있기를 원합니다. 바람도, 비도, 그리고 아무것도 그 새를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의 작은 새가 가냘프로 작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만일 그 새가 크다면 과연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그 큰 새는 당신의 현존 앞에 자기 자신을 내맡길 용기를 감히 내지 못했을것입니다."  

  

매우 간결하게 묘사된 이 글에서 데레사는, 자신에게는 단 한 가지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자기 자신을 태양에게 내맡긴다는 것입니다. '바람과 비'는 본의 아닌 분심, 의기소침, 신앙의 위기, 의혹이나 메마름 등을 의미합니다. 

  

  그대는 새 교회학자의 가르침을 배우십시오.

  

  그대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올지라도 신적 태양안에 충실히 머물러 있으십시오. 데레사처럼 그대의 보잘것 없음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구름 뒤에는 태양이 항상 빛나고 있음'을 신뢰하며 동요하지 마십시오.  

  

  성녀 젤뚜르다가 영적 메마름을 느낄 때에 주님께서 그녀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아마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랑은 값진 장신구를 두른 신부를 보는 것보다 모든 장신구를 벗긴 신부의 목을 보는 것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신랑은 신부의 아름답고 값진 장갑을 보는 것보다 신부의 손을 직접 잡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중세의 이런 신비스런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그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모든 분심과 메마름과 더불어 너 자신을 사랑한다. 나는 특히 가난하고 겸손한 너를 더 사랑한다." 



7. 주님 수난의 기억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놀라운 성체성사로 당신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셨나이다.

- 성체성혈대축일의 본기도 

  

성체성사 안에서 그대는 그대의 구원자이신 구세주를 뵙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하지만 그대가 그분을 몸소 그대의 구원자와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그대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로 받아들였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그대자신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대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누리고 있는 구원에 대해 감사와 기쁨을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으십시오. 거룩함은 우선 첫째로 많은 활동을 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감사는 그대의 마음이 지녀야 할 근본 태도입니다. 

  

  성인품에 오른 에디트 슈타인은 철학자이며 유대인을 위해 순교했던 분입니다. 이 성인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기도는 항상 아주 단순했습니다. 그 중에서 최상의 것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십자가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기를 권장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사랑으로 저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이까? 그리고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했나이까?" 여기에서 우리는 좋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이 주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십자가 상본은 분명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당신 수난의 기억'인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은 실제로 현존해 계십니다. 십자가와 십자가 상본을 공경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신앙인은 그 상본이 묘사하고 있는 분에게 공경을 드립니다. 하지만 성체안에는 주님께서 직접 현존하여 계십니다. 그분은 그대를 위해 돌아가시고, 당신의 피를 통해 그대를 구원하셨던 주님이십니다.   

  

  만일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대가 무엇이 되었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분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분께 거듭 감사하십시오.   




(...다음에 계속)



출처 : <성체 흠숭 길잡이 - 사랑의 광채속으로> / 인게보르그 오베레더 지음 / 성 글라라 익산수도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