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오기선 신부 가난 · 애덕 · 형제애 몸소 실천으로 그 이름 빛내다
 
 
readImg.asp?gubun=100&maingroup=1&filenm=%BF%C0%B1%E2%BC%B1%BD%C5%BA%CE%B4%D41%2Ejpg- 한국 순교자 103위가 시성되자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모든 소망이 이뤄졌다"고 말하던 무렵의 오기선 신부
 
 
'재속 프란치스칸'이 되다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1937년 여름 일제강점 치하 한반도는 어수선했다. 그해 9월 28일 서울대목구 주교관에 갓 서른을 넘긴 오기선(요셉, 1907~90) 신부가 찾아왔다. 작은형제회 선교사 드콰이어(도요한)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캐나다 성 요셉관구에서 막 한국에 파견된 드콰이어 신부는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원형근) 주교 주교관에 머물고 있었다.
 
사제수품 5년차에 불과했지만 서울 백동(현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오 신부는 드콰이어 신부에게 재속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겠다고 청한다. 풍수원본당 보좌로 휴양차 주교관에 와 있던 이광재(티모테오, 1909~50) 신부도 이날 오 신부에 이어 제3회에 입회한다.
 
수도명은 각각 프란치스코, 안토니오였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사상 첫 번째, 두 번째 사제 입회자가 잇따라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평생 회원으로서 성실히
 
오 신부가 첫 사제 재속회원이 된 것은 당시 일제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 고통을 겪던 겨레의 복음화, 특히 지성인들의 입교를 앞당겨 형제애와 가난, 겸손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려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readImg.asp?gubun=100&maingroup=1&filenm=%BF%C0%B1%E2%BC%B1%BD%C5%BA%CE%B4%D42%2Ejpg재속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 회원들이 1939년 1월 3일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서 허원식을 마친 뒤 오기선(뒷줄 오른쪽) 신부와 함께하고 있다.
 
 
이후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오 신부의 한 평생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애덕, 형제애를 충실히 따르는 삶이었다. 그 삶의 양상은 3000명에 이르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신앙선조들의 순교신심을 파고들어 현양하는 교회 역사가로, 언론인들의 대부로, 문필가이자 명설교가로, 시간전례(성무일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기도하는 사제로 그 표징이 드러난다.
 
그 증거가 바로 오 신부가 선종한 지 20주기가 지난 오늘에도 오 신부의 뜻을 이어가는 '오기선 요셉 장학회'다. 2005년에 탄생한 이 장학회는 이제 국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근엔 필리핀과 우간다로 그 수혜 대상을 넓히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오 신부는 1937년 성탄절을 기해 종현(현 명동)ㆍ약현(현 중림동 약현)ㆍ영등포(현 도림동)ㆍ백동(현 혜화동)본당 신자들을 주축으로 첫 입회식을 갖는다.
 
그 회원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훗날 첫 한국인 주교로 서울대목구장에 착좌하는 노기남(당시 명동본당 보좌) 신부, 정지용(시인), 장기빈(백동본당 2대 총회장, 장면 박사 부친), 한창우(전 경향신문 사장), 류홍렬(사학자, 전 서울대 교수), 박병래(전 성모병원장)씨 등 28명이었다. 이로써 서울형제회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종현본당 청년회 설립이 일제 강압으로 무산되자 청년회장 조종국, 정지용 등은 재속 3회에 입회, 1939년 1월 허원(서약)을 했다.
 
이처럼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한 가운데 출발한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오래지 않아 전국적으로 회원수만 400여 명을 헤아리게 된다.
 
오 신부는 이들을 위해 당시 본당사목을 하면서도 3회 담당신부로서 매달 월보를 400부 가량 찍고 3회 기도서와 얇은 3회 규칙을 번역해 등사기로 밀어서 회원들에게 보냈다. 당시 월보 첫 머리는 언제나 "평화, 행복"이라는 글귀로 시작했는데, 한 번은 이 월보가 광주에서 반전인쇄물이라는 의혹을 받아 체포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1944년 12월 대전 대흥동본당에 부임한 오 신부는 해방이 되자 충남도청 사회과에서 직영하던 고아원 '대전학원'을 인수, '충남애육원'으로 개칭하고 고아들과 인연을 맺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송도의 허름한 판잣집에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을 보살폈다. 수복이 되자 대전으로 돌아와 충남사회사업연합회장을 11년이나 역임하며 '고아들의 대부'로 존경을 받았다.
 
 
순교자 현양에도 힘써
 
readImg.asp?gubun=100&maingroup=1&filenm=%BF%C0%B1%E2%BC%B1%BD%C5%BA%CE%B4%D43%2Ejpg오기선 신부가 1939년 4월 3일 서울 백동(혜화동)성당에서 작은 형제회 총장 암브로시오 주교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교회 역사가로서도 오 신부는 순교자현양사업에 힘을 쏟았다. 1920년대부터 한국천주교회사 관련 사료를 모으고 성지를 발굴했다. 그 사료가 오 신부 사후에 고서 80종 197권을 비롯해 중국서 일부를 포함한 국내도서 1600권, 일본서 600권, 서양서 850권 등 총 3237권이 남겨졌다.
 
이 책은 '요셉문고'라는 이름으로 1995년까지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실에 소장돼 있다가 1996년 인천가톨릭대가 개교하면서 상당수가 인천가톨릭대로 이관됐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엔 현재 400권이 남아 있다.
 
오 신부는 또 1973년 무렵 복자 103위 시성운동을 했으며, 1983년 4월에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위원으로 103위 시성식을 준비했다. 1987년 3월에는 한국 천주교 성지연구원을 설립, 청주교구 연풍성지와 서울대교구 삼성산성지의 기초를 닦았고, 1986년 필리핀 롤롬보이에 김대건 신부 동상을 세웠다. 특히 구술사(Oral History)라는 측면에서 증언 채취와 녹취 등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아 신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다양한 대외적 활동
 
다방면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오 신부는 방송을 통해서도 한국천주교회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1960년대 들어 처음으로 작은 형제회와 살레시오회 등 여러 수도원이 오 신부 주선으로 방송을 타면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가톨릭 언론인들의 복음화에도 애정을 기울여 '가톨릭 언론인들의 대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밖에도 오 신부는 동생 오기순(알베르토) 신부가 1941년 일본 도쿄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면서 한국 최초 형제신부라는 기록을 남겼고, 1949년 3월 사제로는 국내 최초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또 1941년 12월에는 서울대목구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려는 일제 계획을 막고자 일본에 건너가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를 설득, 서울대목구장에 한국인 노기남 주교 임명을 도우면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1990년 여든두 살 고령에도 김대건 신부와 이승훈(베드로)의 발자취를 따라 15일간 중국 순례를 강행한 오 신부는 귀국 후 18일 만에 선종해 하느님 품에 안긴다. 성모의 충실한 사제로 세상에 많은 빛을 남긴 재속 프란치스칸 사제의 참으로 빛나는 한 생애였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13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