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오늘 많이 추우셨죠?

저는 묵주기도하면서 내 손안에 있는 초 하나가 참 의지가 되었어요.^^

촛불은 빛만 내는 것이 아니라 열도 같이 내지요.

누군가의 추위를 녹여줄 수 있고, 어둠에 빛이 될 수 있는 이 작은 촛불!

아무리 깊은 어둠도 내 안에 작은 촛불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어둠을 몰아낼 수 있어요.

어둠의 맨 끝에 여명이 오듯이~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미사 드릴 때 손의 모습을 정해주었어요.

양손을 포개어서 손의 앞은 하늘을 향하고, 엄지손가락 두 개는

포개서 십자가를 만드는 겁니다.

손이 모아지면 영혼이 모아지고, 무릎이 꿇어지면 마음이 꿇어져요.

신학교에 가면 신학생들이나 수녀원의 청원자, 수련자들 하나같이

그 기도손이 아름다워요.

초심을 잃지 마라!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손이 모아지면 마음이 모아집니다.

무릎이 꿇어지면 하느님께로 마음이 모아집니다.

오늘 여러분들 복음 들으셨지요?

네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 아끼듯이 사랑하라!

여기 찾아오는 순례자들한테 제가 늘 던지는 화두는

“신앙이 뭡니까?”

한평생 들은 이야기가 신앙인데, 신앙이 뭐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딱 부러지게 말을 못해요.

누가 신앙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죽기까지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겁니다.

과연 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의 그 힘으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는 많이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적어도 세 가지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합니다.

첫 번째,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고통 자체는 악이지만 고통 중에는

내 안에서 밀어내는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 동안 성서에 전해지는 선지자들, 수많은 성인성녀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꽃밭 속이 아닌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벼랑 끝에서, 계곡에 떨어져서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평지에서 당신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첫닭이 ‘꼬꼬댁’ 울었지요.

첫닭이 울고 난 후, 베드로는 땅을 치며 후회했어요.

자신을 바라보던 예수님의 연민의 눈이 떠올랐던 겁니다.

‘내가 당신을 모른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베드로를 회개시켰던 그 닭의 이름은 회개의 닭, 줄여서 ‘회닭’ 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호숫가에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다시 물으시지요.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세 번 배반한 상처를 세 번 연거푸 물으심으로써 치유시켜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다윗 聖王(성왕)

거룩한 다윗왕도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는 뼈아픈 실수를 통하여 성령을 체험합니다.

나단 예언자의 호통을 듣고 옷을 찢으며 회개를 합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성왕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과 음란으로 만든 자식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라고는 했지만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여인을

취하면서 궁궐을 우상의 소굴로 만들었어요.

우리가 잘 아는 바오로 사도에게는 불치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세 번이나 이 병 낫게 해 달라고 청했지만

예수님은 사도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12장 9절의 말씀을 주시지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그 말씀을 받아 삼키면서 즉시 대답합니다.

“네, 주님의 권능이 머물기 위하여 이제부터 제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나는 간질병 환자요, 나는 약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모자라는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첫 번째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고통을 통하여

주님께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성서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제들은 서품 받을 때, 한 남자로서 빼앗기기 싫은 것, 다 빼앗깁니다.

주교님이 사제들에게

“순종하겠느냐!”

“독신으로 살겠느냐!”

“청빈하게 살겠느냐!”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을 서품식 날, 다 빼앗깁니다.

순종만큼 힘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이 내려집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순종하는 첫번째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끝없는 시험을 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또 나이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내놓으래요.

아브라함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해답은 믿음밖에 없었어요.

‘주신 분이 그 분이니 달라고 하면 되돌려 드려야지요.’

성서에는 그 모든 갈등을 이겨낸 당당한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오지요.

전 세계의 정치,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중에 유대인이 많아요.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 복을 받고 있느냐!

아브라함 할아버지 하나 잘 두었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 버리세요.

내 후손에게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순종하는 인간에 대한 첫 번째 축복은

자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느님께 순명하며 사는 동안 축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는 그 축복이 내려가요.

순명하는 두 번째 사람은 그 유명한 모세입니다.

순명하는 자의 두 번째 선물은 기적입니다

다른 말로 ‘죄로부터 해방’, ‘육신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영적인 치유’ 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 순명하는 자에게서 일어나는 축복은

성모마리아를 통하여 깨닫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낳게 될 거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성모님은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이 말은 인간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순명으로 성모님께 주어진 기적은 영적지위에 오르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영적영예의 이름은 ‘천주의 모친’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어머니’ 라고 하는 엄청난 지위에 오르셨지요.

하느님께 순명하여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우리는 영적으로 올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순명하는 자에게는 자손들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고,

치유를 약속받고, 영적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두 번째 모습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주교님이 제게 요구하신 것 중에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감곡 가시오.”

“배티 가시오.”

“아니요, 못 가겠습니다.”

만일 이렇게 순명하지 않았다면 저는 피정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순명하라고

가르치지 못 하고, 한평생 순명하지 못한 죄의식 속에 살았을 겁니다.

김신부의 삶을 보아도 순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세 번째는 혀를 다스리는 겁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많이 생각하고 제일 나중에 말합니다.

늘 다른 이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축복의 말은 그 사람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두 배, 세 배, 나에게 다시 되돌아옵니다.

나를 괴롭혔던 원수를 위하여 축복의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원수에게서 받았던 상처까지도 치유가 됩니다.

집회서 28장 17절에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날 뿐이지만 혓바닥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 뼈 부러트린 적, 많았을 겁니다.

이 짧은 혀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천국에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나서

‘혀를 어디에 둘까~’ 고민, 고민하시다가

목젖 깊숙한 곳에 넣고, 이빨로 담을 치고,

두꺼운 가죽까지 댄 것이 사람의 입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 튀겨가며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납니다.

특별히 성지는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께 다가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느님께, 교회에 대한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은 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없기에 무조건 “네!”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못 보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전 생애를 보고 계십니다.

셋째,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먼저 누군가와 대화하기 전에 주모경이라도 바치고 만나십시오.

자식과 대화할 때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제 입을 가지시고 성령이 제 혀를 가지셔서 우리 둘 사이에

화해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합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복음의 말씀을 믿고

우리 모두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아멘


김웅열 신부님 강론- 마리아 사랑넷에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