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또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의 영적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된 삶을 말씀하시고

두 번째는 순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계시고

세 번째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전해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같이 연중 28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복음가운데 깊은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합시다.


첫 번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공동체 안에서의 겸손, 그렇지요?

이게 오늘 복음의 첫 번째 테마입니다.

예수님 앞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나병환자 열사람이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그 열 명 가운데 한명이 누구였느냐?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웬수지간입니다.

죽었다 깨도 공동체를 이룰래야 이룰 수가 없는 그 두 족속, 유대인과 사마리아가 같은 문둥이라고 하는 그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웬수지간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같은 불운에 처해있을 때는 모든 장벽은 무너집니다.

문둥병과 종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운명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겁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우리들은 평등해집니다.

재벌들도 고통을 당하면 아픕니다.

그리고 한번은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됩니다.

사제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은 고통만큼은 평등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고통을 당하면 겸손해집니다.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고통을 통해서 가까워집니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을 봤는데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홍수가 났어요.

사자, 사슴, 멧돼지, 그 조그만 토끼 같은 것들이 산위로 산위로 피해가다가 산꼭대기 그 좁은데 맹수와 그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짐승들이 같이 모였습니다.

평소같으면 서로가 잡아먹고 죽여야 될 그런 관계인데도 그 홍수라고 하는 그 고통 앞에 그들은 서로 잡아먹지를 않고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서로가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수 없고 서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열 명의 나병환자처럼 서로 손을 잡고 예수님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간구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데~~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데~~

그래도 성당에서 이정도 위치는 내가 차지하고 있어야 되는데~~

딴 본당으로 전입을 갔을 때, ‘내가 그전 본당에서는 회장을 몇 번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 신부님은 나를 몰라보고 내 정보에 대해서 이렇게 눈이 어두울까?’ 하면서 생쑈를 합니다.

그 모두가 하느님 앞에는 헛되고 헛된 짓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의식할 때/ 남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음을 깨닫고 늘 공동체 안에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지만 귀하고 비싼 땅이 되려면 많이 밟혀야 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땅이 되려면 더러운 거 많이 끌어들여야 됩니다.

귀한 영혼이 되려면 교우들에게 밟힐 각오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귀한 열매가 맺어지는 땅이 되려면 신자생활하면서, 모욕을 느낄 때 자존심이 상할 때, 기뻐하십시오.

그때, 그것이 바로 귀한 열매가 맺어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두 번째로 오늘 주님께서는 순명이 무엇이라고 하는 거, 알려주고 계시지요.

그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누구를 찾아가라고 그랬습니까?

누구에게 몸을 보이라고 그랬습니까?

감곡 본당 신부요?

뭐 감곡본당 신부일수도 있겠지요?

‘사제에게 가서 니 몸을 보여라.’

이 얘기는 뭡니까?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라.’ 그 뜻입니다.

사제가 있는 성전 앞까지 가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앞을 지나가야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나병환자들은 격리 생활 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 유대 땅에서는 나병환자들은 어디 감히 사람 있는 동네에 내려옵니까?

나병환자가 보이면 돌로 때려죽여도 그것이 죄가 안 되었던 시절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기 도시 한가운데 있는 타지에게 가서 보여라. 죽을 각오를 하라.’ 다시 말하면 순명에 대한 시험을 하고 계셨습니다.

열 명은 ‘그래~ 나병 걸려 죽으나 저 양반 말 듣고 돌에 맞아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한번인데 저 양반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자.’

처음엔 망설였지만 열 명이 우르르~~ 그 험한 몰골을 해가지고 동네 한가운데로 진입을 합니다.

그런데 들어가다 보니까 어떻게 됐다고 나와 있어요?

슬금슬금 상처가 꾸득꾸득 굳어지더니 몸이 낫더라!

다시 말하면 순명은 기적을 낳습니다.

순명은 기쁨을 가져오고, 순명은 일치를 가져오고, 순명은 하늘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불순명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분열을 가져옵니다.

공포를 가져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사제에게 가서 니 몸을 보여라.

‘공적으로 축복받은 것을 인정받아라.’ 그 뜻입니다.

목숨을 걸고 동네를 지나가는 중에 나병환자들의 몸은 깨끗하게 치유가 됩니다.

그래서 ‘순명은 기적을 낳을 것이다.’ 하는 것을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근데 세 번째 요게 문젭니다.

병이 나은 것까지는 좋았어요.

그 이 세 번째 테마는 뭐냐? 바로 감사입니다.

열 명이 분명히 병이 나았는데 돌아온 인간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예요.


여러분들, 제가 질문하나 할께요.

하늘나라에 갔다 오신 분 계세요?

없죠?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는 거는 다 믿어도 돼요.

아직은 증명이 안 되니까~~

하늘나라에는 부서가 많이 있어요.

여러 가지 부서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천사들의 사무실이 있어요.

천사들이 모여서 이렇게 활동하는 사무실인데 그 사무실 안에도 파트별로 여러 파트가 나눠져 있어요.

하늘나라에 갓 도착한 영혼이 베드로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그 영혼에게 하늘나라를 두루 구경시켜주었죠.

처음에는 천사들이 가득 붐비는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부서로 가서 걸음을 멈추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지요.

이부서는 접수처랍니다.

무슨 처요?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 세상의 모든 청원을 이곳에서 접수한단다.’

수많은 천사들이 뭐 그냥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눈코 뜰새없이 세상에서 올라오는 청원을 일일이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다 적고 있었어요.

그곳을 나와서 다시 두 번째 부서에 도착했더니 거기도 천사들이 막 분주하게 일을 해요.

“여기는 뭐하는 부섭니까?”

“아~ 여기는 포장 및 발송 처야. 일단 접수한 것을 그대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포장을 해서 다시 내려 보내는 포장 및 발송 처,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은총과 축복이 이곳에서 포장돼서 지상의 청원 당사자들에게 발송되는 장소란다.”

그곳 역시 천사들이 정신이 없게끔 바빴습니다.

그만큼 많은 축복과 기도와 응답이 포장되어 지상으로 배달이 되기 때문에 그곳 천사들은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으로 사무실에 가장 후미진 구석에 마지막 부서가 있었는데 둘은 그 앞에서 멈췄습니다. 놀랍게도 그 부서에는 천사 단 한명이 할일도 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었습니다.

“아니 베드로님! 여기는 뭐하는 덴데 이렇게 천사들이 놉니까?”

“아~ 여기는 확인 처야. 확인처.”

“근데 어째서 이곳은 이렇게 한가합니까?”

“서글픈 일이지. 지상 사람들이 부탁한 기도와 응답과 축복을 받고나서 잘 받았다고 확인서를 보내는 일이 거의 없어. 분명히 발송이 되긴 발송이 됐는데........도대체 선물을 받은 건지 안 받은 건지....”

하늘나라 부서 중에서 제일 한가한 부서가 확인처이듯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 열사람 말씀을 생각하면 그것이 틀림없이 맞는 말일 겁니다. 치유를 받은 나명 환자 10사람 중에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이방인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역시 그들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단 1분 1초라도 하느님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예기치 못했던 불행과 사고의 얼음판 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라디오, TV를 통해서 수많은 사고를 접합니다.

나라고. 우리 가족이라고 해서 그들이 당한 불행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건재합니다.

이 어찌 하느님의 보호하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생물은 반드시 표현을 합니다.

사과도 익으면 고맙다고 빨갛게 ‘감사합니다!’ 하고 표현을 하고..

감도 익으면 노란 모습으로 ‘주님, 감사합니다...익게 해 주셔서.’

모든 세상 생물은 다 표현할 줄 아는데 유독 가장 하느님에게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만이 얼마나 지가 다 잘나서 사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지가 다 잘나서 아침에 눈을 뜨는 줄 착각을 하지요!

오늘 아침 여러분은 두 눈이 떠졌길래 성당으로, 순례지로 찾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 눈이 안 떠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루 눈을 떠야 ‘아, 주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구나!’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듯이, 그저 고마움을 잊고 감사의 불감증 환자처럼 살아갑니다.


아주 조그만 일, 오늘 아침 새날을 맞게 된 것/ 학교나 직장에서 오늘 하루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것/ 온 집안이 건강한 것/ 아기의 출산/ 아기가 걸음마를 하게 되고/ 아빠, 엄마를 부르는 일/ 앞마당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오곡백과가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햇빛이 골고루 비추어 주었던 일/ 계절의 변화로 빨갛게 노랗게 나뭇잎에 단풍이 들어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던 일/ 집안에 복실강아지가 오늘도 주인을 알아보고 반기는 일/ 해와 달과 별과 공기와 바람과 더위와 추위등/ 나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일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체부아저씨들 까지도/ 특별히 나를 낳아 주었던 부모님들/ 나를 영세 받도록 이끌어 준 은인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

그리고 사죄 받고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하는 은혜 등등

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 하루 종일 그것을 나열해도 이 하루가 짧을 정도로 우리들은 온몸으로 은총의 코팅을 받고 있는 그런 감사의 존재들입니다.


데살로니카 5장 18절에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믿지 않는 이들도 자기에게 기쁜 일이 생길 때는 감사합니다.

신앙이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도 좋은 일이 생길 때는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처지에든지 감사하라!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 앞에 가기까지, 우리는 빛과 어두움, 그 둘을 같이 지고 가야합니다.

주님의 은총의 빛이 쏟아지면 반드시 그림자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뒤에 있는 그림자만을 한평생 안고 징징거리면서 앞에 쏟아지는 은총의 빛을 못 보고 살아갑니다.


교우들을 지켜볼 때 여러 종류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열심 해 보이기는 한데 어둡게 열심 한 사람이 있고, 아주 밝게 열심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둡게 열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자기 가족에게 얼마나 은총의 빛이 앞에 쏟아지는 줄 모르고 늘 뒤에 생기는 그림자만 보고 365일을 징징 짜면서 살아갑니다.

아물만 하면 그 상처 다시 후벼 파냅니다. 딱지 질만 하면 그 상처 다시 끄집어 내서 피를 흘립니다.

그러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아! 아이고 지겨워, 하느님은 나를 미워하는것 같애!’

그렇게 말하는 그 자매는 감사할 일이 훨씬 더 많은데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밝게 열심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사는 것이 여유 있고 아무 문제 없기 때문에, 돈이 펑펑 남아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밝게 열심한가? 아니죠!

쌀독에 쌀 한 톨 없어도 어떻게서든지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그런 집에는 하느님이 머무십니다.


오늘 열 명의 나병환자들, 그 얼마나 기가 막힌 인생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놈들, 제일먼저 주님을 찾아와야 되는데 어디로 갔겠습니까?

‘요놈들 봐라! 나 병들었을 때 내 마누라가 나를 버리고 갔어! 내가 가서 혼을 좀 내 주어야지’

아마 아홉 명은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것 보다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든 뭐를 하든, 힘이 생겼으니까 나 업신여겼던 놈들, 두고 봐라, 박살을 내 보리리라‘

이를 악물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배은망덕한 나병환자는 먼 데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입에서 <감사합니다> 는 소리가 몇 번 나옵니까?


신앙인이냐! 아직도 종교인이냐! 그 차이는 그 사람 입에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많이 나오면 신앙인이지만, 불평불만이 나오고 험담하는 말이 끊이질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도 종교인입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로 갔느냐, 그런데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면서 살아갑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치유 받은 아홉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세 가지 주님의 영적 테마를 정리하면 첫 번째는 뭡니까?

겸손입니다.

같은 고통을 당하면 하나가 됩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존재입니다.

남에게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고, 돌을 던질 자격도 없습니다.

남이 나를 깔아뭉개도 “예, 감사합니다!” 해야 됩니다.


두 번째 영적테마는 순명입니다.

사제에게 가서 보여라!

자살하라는 그 뜻이었습니다.

가다가 돌에 맞아 죽어라! 그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사람의 순명을 시험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가자!’

가다 보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명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거, 이것이 두 번째 영적 테마입니다.


세 번째, 뭡니까?

감사입니다.


그토록 많은 은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내 맘이 다르듯이...

그러나 신앙인은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 어려움만 해결해 주시면 주님께 감사드리겠습니다.

그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이 해결이 된 다음에도 더 큰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저는 사제생활 25년을 하면서 ‘우리 천주교신자들이 참 감사에 인색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신부님, 감사예물 봉헌합니다. 집 팔았는데 십분의 일 감사 봉헌합니다.’

‘오늘 행상했는데 행상한 금액의 십분의 일 봉헌합니다.’

그런 분들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신교신자들이 천주교인 사제에게 찾아와서 십일조를 봉헌하고 감사예물을 봉헌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언제 깨졌느냐!

이 성모님 성지에 와서 ‘아,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봉헌이 뭔지만 정확히 가르쳐 주면 이렇게 봉헌할 수 있구나!’

이 성지에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그렇죠?

무슨 얘긴지 아시죠?

1년 11개월 만에 30억의 봉헌을 받아가지고 빚을 다 갚았어요.

1년 11개월 만에 ~~

우리 천주교신자들도 개신교신자 못지않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잠시 후에 주님께서는 성체로 오십니다.

사제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들어가셨듯이 이제는 주님의 여러분에게 가십니다.


성체를 영하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10. 14일 연중 28주일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