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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에 대한 나쁜 경험이 좋은 고해사제가 되는 동기가 되다
복단 요한 만디츠(Mandic)가 여덟 살 때에, 그의 누나는 어떤 사소한 잘못 때문에 복단을 혼낸 뒤 고해성사를 받으러 성당으로 끌고 갔다. 사제는 복단에게 보속으로 성당 한 가운데 한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있으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깊게 슬퍼하면서 거기에 머무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사소한 잘못 때문에 아이를 이토록 엄하게 다루어야 하나? 내가 크면, 형제가 되고 고해사제가 되어 죄인들의 영혼들에게 크나큰 자비심과 선량함을 행사하는 형제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약속한 대로, 복단 만디츠는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라고 불리게 된 카푸친 형제가 되었고, 교회의 가장 유명하고 다정한 고해사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죄인들을 자비롭게 다루는 모든 사제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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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적 배경
1866년 5월 12일, 복단 요한 만디츠는 현 모네네그로, '헤르제그 노비'라는 곳에서 카롤로따 짜레비츠와 베드로 만디츠의 열두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이탈리아말로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라고들 하는 '헤르젝 노비(Herceg Novi)'는 '신성(新城)'이라는 뜻이다. 베니스의 관구에서 온 카푸친들은 1688년부터 헤르젝 노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먼저 해군 사목에, 그리고 나중에 설교에 종사했다. 헤르젝 노비의 다민족 주민들은 크로아티아, 그리스, 세르비아, 러시아, 터키 사람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은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매우 다각적인 지역이었다. 그런 만큼 로마 가톨릭 외에 정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파, 그리스도 단성론자, 회교인들이 고루 섞여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이 힘차게 살아남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베니스의 카푸친들 덕분이었다.


Leopold_02.jpg'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가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다
세례명인 ‘복단(Bogdan)’의 뜻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이(라틴어로 Adeodatus)' 라는 뜻이다. 복단의 부모님은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정치적인 변동에 의해 그 동안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한 가족의 곤경과 고뇌를 어려서부터 접해온 덕분인지 복단은 특히 사회적으로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1882년 5월 2일, 열여섯 살인 복단은 집을 떠나 베니스의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소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이탈리아, 우디네(Udine)로 갔고, 2년 후 1884년 5월 2일에 비첸사(Vicenza)에 있는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의 형제회에서 수도복을 입고 레오폴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리고 1885년 5월 4일에 첫 서약을 했고, 1888년 10월 28일에 파도바에서 종신서약을 했다. 1890년 9월 20일, 24세인 레오폴도 형제는 베니스에서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선교 생활에 부적합한 이로 여겨지다
성인이 된 이후의 모든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선교사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는 고향에 돌아갈 희망을 품은 이 젊은 사제는 이탈리아 국적을 여전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던 제1차 대전 때에도 자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국적을 포기함으로써 고향을 배반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전쟁 기간 동안에 남이탈리아에서 국내 유배형(流配刑)을 살아야만 했다. 대전 후에 레오폴도 형제는 자신의 고향에 파견되어 설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특히 언어 장애가 있었고 더듬기까지 했기 때문에 설교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135센티 미만의 키에 연약한 몸은 굽었으며 얼굴도 창백했다. 시력도 안 좋았고 위장병과 신경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그러한 이유로 카푸친회의 봉사자들은 레오폴도 형제를 설교와 선교에 적절하게 여기지 않았고, 대신에 그를 고백성사 사제로 임명했다.


교회일치에 헌신하도록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사실 그는 1887년, 기도 중에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몸 바칠 부르심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고, 특히 성모님의 중재로 그 꿈을 이루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더욱이 동방 유럽으로 선교사로 파견될 준비로 그리스어와 그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와 슬로베니아어도 배우고 있던 터라 그에게 있어 순종이란 적지 않은 고통을 준 희생이었다. 레오폴도는 그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새와 같지만 내 마음은 바다 저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계시로 인해 자신의 이 특별한 사명은 선교지에 있지 않고 고백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인은 그에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고해성사 안에서 당신이 도와주시는 모든 영혼이 바로 당신의 동방(東邦, 선교지)임을 알려주라고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교회일치의 사명에 대한 열정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가 동부의 민족, 즉 '동방교회의 반체제인사'들의 구원을 위해 뽑힌 것에 대하여 나는 하느님 앞에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봉사직무를 통해서 오직 한 목자 아래 단지 한 양 떼 밖에 없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도록, 나는 나를 은혜로이 뽑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선하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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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꿈은 고해실에서 이루어지다
비록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과는 달랐지만 레오폴도 형제는 그 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 일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고백실 안의 훌륭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장상들의 불허에 온전히 복종했던 것이다. 고요하고 자비로운 성품으로 타인의 위한 봉사에 항상 준비된 그는 애덕의 실천을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명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았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었던 카푸친 형제회 안에서는 봉사에의 몰두 때문에 자주 공동체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오해하고 비난하는 형제들이 많았다. 또 고백자들을 너무 너그럽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반기를 드는 형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레오폴도는 고백성사의 직무를 인간적 품위에 걸맞은 자애로운 존경심과 이해심으로 이행했다. 사제의 친절함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화해의 성사 안에서 고백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나쁜 모범' 따르기
어떤 사람들은 레오폴도 형제가 죄인들에게 '소매가 넓은(di manica larga)' 사람이라고 투덜댔는데, 생생한 관용 표현인 이 이탈리아 말은 죄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레오폴도 형제가 주교에게 밀고 당했을 때에, 그는 주교관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가리켜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죄인들을 향해 소매가 넓다'는 이유로 저를 나무라신다면 저는 주님께, '파로온 베네네토(Paròn Benedeto : 이탈리아말, 베니스의 사투리로 복되신 보스라는 뜻인데 레오폴도가 흔히 하느님을 높여 이르는 말)', 이에 대하여 당신께서 저에게 얼마나 나쁜 모범을 보여주셨는지요! 저로서는 아직 영혼들을 위하여 죽으신 그 어리석은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는걸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고백자들에게 과도하게 착하게만 군다고들 하는데, 사실 사람들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 저는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를 원한다는 충분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뛰어 넘습니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매일 고해성사를 받아야 했던 성스러운 고해사제
하지만 레오폴도 형제에게 이런 부드러운 태도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성질이 불같이 과민하여 상처를 쉽게 받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타고난 성질 때문에 평생 동안 싸워야 했고, 그 때문에 분노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고해성사를 받았던 것이다.

고해성사를 매일 받아야 했던 고해사제였던 레오폴도 형제는 그러한 자신을 이겨내며 고백자들에게 조그만 보속을 주고는 남는 보속을 늦은 밤에 자신이 직접 했다. 어쩌면 레오폴도 형제의 가장 큰 개인 보속이라면 겨울에는 냉장고 같으며 여름에는 불가마 같은 (넓이197.5, 길이127.5, 높이187.5 센치) 작은 고백실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해자들을 편안하게 해준 친절한 사제
그는 회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심하세요. 제 어깨에 모든 것을 지우십시오. 제가 떠맡을 거예요."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수년 동안 성사들을 받지 않았던 파도바의 한 신사한테 이런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그는 매우 당황되고 헷갈려서인지 고백실에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기는커녕 그만 사제석에 앉아 버렸는데, 레오폴도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해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의 고백을 들어 주셨답니다."


Leopold_08.jpg성모님께서는 그의 '복되신 여성 보스'이셨다
레오폴도 형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이 있었는데, 그분을 자신의 ‘파로나 베네데타(Parona Benedeta)’ 또는 ‘복되신 여성 보스’라고 일컫곤 했다. 무염시태의 부속제단에서 미사를 거행했으며 자주 묵주기도와 성모소일도를 낭송하곤 했다고 한다. 1934년 7월, 파도바 교구의 루르드 성지순례에 참석한 그는 그 곳 성모님께로부터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성모님께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에는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어느 피조물인 인간이라도 겪을 수 있는데 만큼 모든 고통을 겪으신 동정녀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고민을 이해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레오폴도의 애덕
또한 그는 임신부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어서, 병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도바의 주변 병원에 자주 방문했으며, 또 아프거나 나이가 많은 형제들을 위로하려고 카푸친회의 환자실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레오폴도 형제는 의사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반복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의사이시자 의약이십니다."


사목적 목표에 따른 평생 교육
사실 그는 의사들과 심리학 전문가들과 교류함으로써 더욱 더 좋은 고해사제가 될 방법들을 터득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평생 학생이길 원했던 레오폴도 형제는 죽을 때까지 성 토마스 데 아키노나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 저서를 읽었고 최근의 윤리신학과 사목신학의 연구 자료들도 공부하곤 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의 영혼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회개자 스스로 죄를 고백하기 전에 그는 사람들이 지은 죄를 다 헤아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한 편으로는 초자연적 은사이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 신학과 자연학 연구의 결과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선한 인성에 묻어난 배려심의 결과였다.


커피에 대한 의존도가 그의 죽음을 재촉했나?
고백실에서 그의 모든 생을 헌신한 레오폴도 형제는 졸음을 피하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많이 마시곤 하였는데 결국 그 커피 때문에 고통스러운 식도암에 걸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찾아오는 회개자들에게 "자! 저 여기 있어요. 그냥 들어오세요!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하며 환영하였다. "사제는 오로지 사도직의 수고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그 외 다른 죽음은 그 어느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권고를 끝까지 실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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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노고하시다 결국 죽음 자매를 만나다
마침내 1942년 7월 30일, 레오폴도는 미사 제의를 입다가 제의실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자신의 독방으로 실려가 병자 성유를 받은 뒤, 그곳에 모인 온 형제들과 함께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를 낭송하는 도중에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 부분에서 선종했다. Leopold_11.jpg그가 76세가 된 해,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한지 60년이 되었고 사제품을 받은지 52년이 되던 해였다. 그의 죽음은 역시 식도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 신체의 다른 곳은 모두 부패했지만 '고백성사' 사죄경을 주었던 그의 오른손은 오늘날 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76년 5월 2일, 바오로 6세 교황은 헤르젝 노비의 레오폴도 형제에게 시복을 주었다. 그리고 1983년 10월 1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에게 시성을 베풀었다. 오늘날 성 레오폴도는 그의 삶의 지향과 모범으로 인해 '일치의 사도', '고백성사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루어진 예언
죽기 전에 레오폴도 형제는 고백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형제회 건물마저 호되게 (폭탄을) 맞을 것이지만, 이 작은 독방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곳은 당신의 선하심에 대한 기념물로 남아야 합니다." 그 예언대로 1944년, 성당과 형제회의 건물은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는데 성 레오폴도의 고해실과 성인이 좋아했던 성모상만은 무사히 남았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모신심이 깊은 이 고해사제의 평생 헌신에 대한 이 얼마나 좋은 기념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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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