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축일입니다.

필립보 네리 성인은 살아 생전에 참으로 유쾌하고 재미있으셨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카드 놀이를 하기 위해 성인의 방에 몰려들었다고 하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요.

필립보 네리 성인에 대해 검색하다가 삼천포로 빠져서 요한 보스코 성인에 대한 글을 퍼왔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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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많은 이들이 돈 보스코(Don Bosco·1815~1888) 성인을 두고 ‘사제의 이상형’‘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톨릭 교육자’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에 청소년 교육 영성을 도입한 대영성가이자,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호교론자였다. 근대 선교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20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그들의 ‘놀이터’에서 일생을 보냈고, 그 한가운데서 일생을 바쳤다.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의 베끼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니’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이웃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우울한 성장 과정은 불균형적인 인격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학의 전통적 견해는 돈 보스코에게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늘 쾌활했으며 재치가 넘쳤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게임과 오락을 즐긴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수, 배우, 마술사 등으로 불렸으며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남달리 충실했으며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결국 밝고 맑은 성격의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전날 밤, 보스코는 9가지 결심을 세우게 된다.

▲ 환자 방문과 같은 중대한 이유 외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겠다.
▲ 시간을 엄격히 사용하겠다.
▲ 영혼을 구하는 문제라면 언제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겠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자애와 온유를 본받겠다.
▲ 건강에 해롭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항상 만족하겠다.
▲ 포도주를 마실 땐 물을 타서 마실 것이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마시겠다.
▲ 일은 영혼을 해치는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루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겠다.
▲ 묵상과 영적 독서를 위해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 미사 전에는 최소한 15분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며, 미사가 끝난 뒤에도 15분 이상 감사경을 올리겠다.
▲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영적 지도에 필요한 때 외에는 여성들과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사제 보스코는 모든 노력을 다해 자신의 결심을 실천해 갔다. 이후 그는 우연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방문하는 경험을 한다. 또 얼마 뒤에는 성당의 제의방에서 한 고아 소년을 만난다. 이로써 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집도 일거리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두 제작, 양재, 목공, 인쇄 제본 등의 기술을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저술과 출판활동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땀을 흘렸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강요와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감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 대응했다.

그는 이어 그의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의 협력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 선교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71년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돈 보스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영성 : 생각과 말이 하느님과 함께 한 사제 

사제의 해를 맞아 사제 영성에 대해 이야길할 때, 돈 보스코는 특히 가깝게 다가온다. 성인은 은수자가 아니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15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돈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돈 보스코가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이 아니다. 돈 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회원에게 그가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돈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돈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돈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 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돈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추상적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의 영성은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 보다 육화되었으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실현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다. 돈 보스코는 그 이웃 중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한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돈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돈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삼종기도를 통하여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 즉 닭이 우는 새벽,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 사업의 창립자이시요 후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돈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그분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돈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르쳤다. 돈 보스꼬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우리의 영혼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회의 목적입니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신부는 혼자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잘 살면 그의 좋은 표양으로 구원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잘 살지 못하거나 악표양을 주게 되면 그 악표양으로 저주받은 영혼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돈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양을 권하는 한 부인에게) 저는 제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 여러분이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출처 : 요요안 신부의 가톨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