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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월 3일 개봉한 영화 ‘위대한 침묵’(162분)이 묻는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 생각해봄직 한 원론적인 질문에 알프스 깊은 산 속에서 평생을 보낸 노(老) 수도자가 답한다.
“주님의 깊은 뜻을 찾지 못한다면 계속 살 이유가 없네.” 짧고 명료한 답변에 노 수도자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담겨있다. 화려한 출연진과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지 않았음에도 영화 ‘위대한 침묵’이 단연 돋보이는 것은 깊은 내면에서 찾고 있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해답을 향해 가는 길까지 함께 제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1688년 해발 1300m의 알프스 산 중에 세워진 이래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카르투지오 수도원을 영상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가치를 더한다. 영화의 구성은 단순하다.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어떤 효과음도, 배경음악도 없이 침묵으로만 이어진다. 간간이 수도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나오지만 침묵 수행을 이어가는 수도원이기에 기본적으로 대화 자체가 많지 않다. 반복되는 영상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침묵으로 인해 지루해질 수도 있다. 상영시간이 약 3시간에 가깝지만 관객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소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매일 같은 의식 속에서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모습은 소리 없이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위대한 침묵’의 힘이다. 봉쇄 수도원, 드디어 문을 열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1688년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진 후 단 한번도 일반인에게 내부를 공개한 적이 없다. 1960년 수도사들을 찍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수도원에 들어갔던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 전부다. 그뢰닝 감독도 84년 촬영 신청을 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했다. 대학에서 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던 중 돌연 영화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를 찍기보다는 제 스스로를 돌아볼 침묵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어요. 그래서 촬영을 거절당한 뒤 다른 수도원을 찾아가 열흘 간 수행을 했죠. 수도원의 조용한 리듬에 빠져들다 보니 제 내면의 목소리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됐어요. 아, 이런 삶을 극장에서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면 정말 굉장하겠구나 싶었죠. 수도원과 극장은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그가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고집했던 이유는 침묵수행을 가장 엄격히 지키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당한 후 ‘위대한 침묵’ 프로젝트는 그의 가슴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5년 만인 99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아직도 영화 찍을 생각이 있느냐”는 전화가 수도원으로부터 걸려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아요. 정말 기쁘고 떨렸죠. 내가 과연 잘 만들 수 있을까 한 달 넘게 고민을 거듭하다 수도원을 찾아갔어요. 15년 전 내 느낌이 틀리지 않겠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죠.” “인공 조명·사운드 절대 불허”

평소에 방문객을 전혀 받지 않는 수도원이 ‘비공개’ 원칙을 바꾼 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예술가를 필요로 한다’는 내용의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한 덕이 컸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사진이든 책이든 영화든 매체에 상관없이 우리 삶의 방식을 세상에 알리자는 분위기가 조성된 거죠.” 그렇지만 촬영 조건은 깐깐했다. “인공적인 조명이나 사운드를 쓰지 말 것, 수도원의 삶에 대한 논평이나 해설을 하지 말 것, 스태프 없이 혼자 찍을 것, 영화의 첫 공개는 영화제에서 할 것 등 이었죠. 조건이 빡빡하다는 불만이 안 들던데요. 애초 제 기획과 정확히 일치했거든요. 카메라가 무거워 끙끙대긴 했지만 혼자 찍었기 때문에 수도원 생활의 순수함과 강인하고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끼고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수도원의 사계를 담기 위해 촬영에만 2년이 걸렸다. 순수 촬영기간은 6개월. 기도와 묵상, 미사, 식사와 산책 등으로 되풀이되던 수도사들의 경건한 삶은 영화 막바지, 눈썰매 타는 장면에서 반전을 맞는다. 조용하던 객석에 웃음이 터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이처럼 단순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평소 고된 수행을 하는가를 느끼게 하는 
역설적인 장면이죠. 아마 관객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카르투시오 수도회

독일 쾰른의 성 브루노(1030∼1101)가 1084년 프랑스 알프스지대의 샤르트뢰즈에 설립했다. ‘하느님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수도사들은 청빈·정결·순종·침묵을 서원하며 독방생활을 한다. 외부 방문객은 일절 받지 않으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4시간의 산책 중에만 대화가 허락된다. 가톨릭 수도회 중 가장 엄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경북 상주시)을 포함해 전세계에 19개의 수도원이 있다. ‘위대한 침묵’을 촬영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카르투시오 수도회 산하 수도원 중 가장 역사가 가장 오랜 대표 수도원이다.

성교회의보석, 카르투시안 수도회와 성 브루노 연중내내 눈 덮인 프랑스 알프스산 중턱(해발 1300미터)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 <샤르트뢰즈>라고도 하는 이 카르투시안 수도원은 철저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이며, 1081년 성 브루노가 창설한 카르투시안 수도회이다. 사방이 벽으로 갇힌 곳에서 바깥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매일 한끼만의 식사로 소재를 지키며 세상 모든 인간적 재미와 흥미를 떠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리는 이곳 수도승들이 세상을 떠나 홀로 선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성소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이들 수도승들의 희생과 보속을 시대에 뒤떨어진 우둔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희생과 보속이 쓰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나 해당 되는 말이지,
사실 이들에게는 너무도 즐거운 영예이다. 많은 이들은 이들의 은둔생활이 세상을 외면하는 사랑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들이 매일 홀로 숨어서 주님께 올려 바치는 미사성제, 희생과 보속, 기도,
모든 인간적 아픔등이 누구들 위한 것인지를 안다면! 이들이야 말로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주님께 호소하고 있는것이다. 이 혼탁한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사랑의 주체인 것이다. 이 수도원은 세상의 변천에 동승하지 않고 거의 천년동안 초기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 계승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수도회가 더 이상 엄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모두 완화된 규칙을 채택했으며,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도 윈래의 엄률로 돌아오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카르투시안회 만이 단 한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카르투시안 수도승들은 각자 은수처에서 독거생활을 한다. 돌덩어리로 지은 수 백년된 은수처는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작업실,장작보관소,화장실이 있고, 2층은 침실,기도실,공부방,성모경당이 있으며, 
3층은 바닥 전체에 모래가 깔려있다. 하느님과 함께 숨고 싶을때 사막 같은 이곳에서 기도할 수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저녁 7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녁 11시 30분에 다시 일어나서 밤기도를 마친 후 다시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음식은 점심 한끼만 제공되는데,조그만 구멍문을 통해 들어온다. 아침식사는 없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만 먹을 수 있다. 카르투시안은 어떤 경우에도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콩이나 치즈를 자주먹는다.
매주 금요일은 물과 빵으로 때운다. 점심에 먹은 식사가 남았더라도 남겨 놓지 않으며 오후 2시 이전에 음식창을 통해 모두 반납한다. 하루에 3번 - 미사, 저녁기도, 아침기도때 - 수도승들은 각자의 은수처를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수도원내의 고풍스러움, 조각들, 성화들, 수도원임을 인식시켜주는 여러 분위기들이 배어있는 복도만 걸어도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수도복 두건을 푹 덮어 쓴 채 성당으로 향하는 수도승들의 모습에 이미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진다. 이곳의 기도의 양은 타 수도원의 배가 넘는다. 수백년동안 전승된 고유의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있어 
이 기도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가톨릭 전례를 그 원형대로 보존해 온 수도원이다. 모든 전례는 라틴어로 한다. 라틴어 만큼 하느님을 아름답게 찬미할 수 있는 언어 또한 없기 때문이라고한다. 전례의 절정은 '녹턴'이라는 밤기도(성무일도의 아침기도에 해당됨)인데, 자정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나는 장대한 기도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로 읊어지는 모든 시편은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이곳 수도승들은 거의 모든 시편을 암송하기 때문에 불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은은히 성가로 암송한다. 옆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중세풍의 대성당에 울려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그 여운... 불빛이라곤 감실의 불빛만이 보인다. 수도승들은 봉쇄수도승,평수도승,일반수도승,이렇게 3계층으로 나눠져있다. 봉쇄수도승들은 모두 사제이다. 하루에 세번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미사,저녁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로 각자의 은수처를 떠날 수 없다. 철저히 갇혀서 하느님과의 일대일 관상에 정진한다. 이 사제들은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미사를 드린다. 봉쇄수도승들이 각자의 미사를 봉헌하는 경당이 50여개나 된다. 그렇지만 대성당에서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그리고 아직 서품을 받지 않은 봉쇄수도승를 위해 한명의 사제가 교대로 미사를 봉헌한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사목적인 지향이 전혀 없고 -심지어 수도원 안의 다른 수도승에게 까지도- 오로지 관상에만 힘쓴다. 세상의 눈으로보면 이들은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한 채, 각자 영신수련에만 힘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갇힘,세상과의 결별,희생,은수를 통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충을 떠 안고 있는 것이다. 이곳 수도승들은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에 산악 행군을 한다. 운동 부족을 보충해서 육체적,정신적 침체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극기 훈련이며,
비가와도 이 산악 등반은 취소되지 않는다. 등반은 굉장히 힘든 강행군이다. 도중에 가다 쉬는 일이 없다. 이 날 만큼은 서로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두사람씩 짝을 지어 가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짝을 바꾼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수 있도록 모두 한번씩 만난게 된다.이때 나누는 대화는 영적 주제들 뿐이다. 수도원 내에서의 침묵은 거의 절대적이다. 말 뿐만 아니라 발걸음, 문소리 하나 하나에도 조심하려고 애쓴다. 대성당 입구엔 일렬로 나열된 개인 사물함이 있는데 전할 말이 있을 경우 쪽지를 써서 당사자 사물함에 넣는다. 이웃 사랑이 말 없이도 침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녹턴' 또는 저녁기도 때 사용하는 카르투시안 성무일과 기도서는 어른 팔 길이만큼 크다. 건강한 수도승이 힘을 다해야 들 수 있을 만큼 무겁다. 그런데 성당에 맨 먼저 도착해서 이 모든 기도서를 꺼내 수도승들 가대에 페이지까지 정확히 펼쳐 놓은 수도승은 70 이 넘은 수도승이다. 신학과정에 있는 수도승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없을 경우, 외부에서 신학교 교수를 초빙한다. 이곳 수도승들은 절대 외출을 하지않는다. 수도승마다 그 진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진도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각자의 역량대로 따로 지도한다. 신학이 수업을 통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각 수도승의 관상 생활 자체가 되도록 지도하며, 신학과 철학을 가슴으로 체험하고 이해하며, 기도의 삶이 되도록 배려한다. 이곳은 대축일이 오면, 그 전날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며 미리 마음을 준비한다. 대축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미사나 성무일과가 평소보다 더 아름답고 장대하다는 것 
뿐이다. 대축일 같은 툭별한 날이 아니면,사제는 십자가 상을 향해 미사를 드린다. 인상적인 것은 성찬 전례 때 정적과 침묵 속에서 미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변화 시키고, 거양하고, 교회와 인류를 위해 기도하는 순간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주례 사제도 정적 속에서 속으로 경문을 외운다. 너무 엄숙하고 고요해서 긴장감마저 감돈다. 이 순간 미사 참례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최고의 흠숭을 드린다. 현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수도회의 영성은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성교회가 택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결정된 교회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은 거의 모든 수도회의 영성에 영향을 끼쳤고 실제로 관상수도회조차 이에 동승하는 추세이다. 사랑.기쁨,화합의 영성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주신 선물임에 분명하지만, 이영성이 과거의 침묵,고독,희생등 수덕적 영성보다 더 낫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교회가 몰랐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은 열어 주신 것이지, 과거의 길을 폐쇄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쁨과 화합의 영성이 현 시대의 주류를 이룬다고 해서 
과거의 수덕적 영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가톨릭다이제스트 2002년 10월호에서 -

브루노 수사는 어느 날 밤기도를 하고 있다가 개구리 한 마리가 개굴개굴 울어 대는 소리에 분심이 들었다. 그 소리를 무시하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모두 헛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창문을 열고 외쳤다. "조용히 해라! 기도 중이다." 브루노 수사는 성인이었기에 그의 명령은 즉각 실행되었다. 기도 하기에 좋은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삼라만상이 잠자코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소리가 브루노 수사의 기도를 방해했다ㅡ내심의 목소리가 말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네가 시편 노래하는 것을 기뻐하시듯이 저 개구리가 개굴개굴 우는 소리를

기뻐하실지도 모르지." "개구리 우는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듣기 좋으실 게 뭐야?" 하고 브루노 수사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왜 그 소리를 만들어 내셨다고 생각하느냐?" 브루노 수사는 이유를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명령했다. "노래해라!" 그러자 그 개구리가 박자에 맞춰 개굴개굴 우는 소리가 밤하늘을 메우더니 근처에 있던 모든 개구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반주에 맞추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브루노 수사가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을때, 그 소리들이 이제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안 들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 소리들은 오히려 밤의 고요를 짙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나자 브루노 수사의 마음은 삼라만상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했다. - 개구리의 기도 (앤소니 드 멜로) -

「귀고」의 기도 주님, 얼마나 많은 즙을 당신은 포도 한 알에서 짜내시는지요. 얼마나 많은 물을 당신은 옹달샘에서 길어 올리시는지요. 얼마나 큰 불을 당신은 작은 불씨로 일으키시는지요. 얼마나 큰 나무를 당신은 씨알 하나로 자라게 하시는지요. 제 영혼은 너무 메말라, 혼자서는 기도를 할 수 없지만 당신은 그것에서 수천 마디 기도를 짜내십니다. 제 영혼은 너무 강퍅해,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지만 당신은 그것에서 당신과 저의 이웃을 위해 무한 사랑을 길어 올리십니다. 제 영혼은 너무나 차가워, 혼자서는 아무 기쁨도 없지만 당신은 제 안에 하늘 기쁨의 불을 일으키십니다. 제 영혼은 너무 연약해, 혼자서는 아무 믿음도 없지만 당신 힘으로 제 믿음은 높이 자라납니다. 기도와 사랑과 기쁨과 믿음으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로 하여금 늘 기도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신실하게 하소서. -「귀고」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