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한주일 동안 편안하셨죠?

우리는 지난 19일 날 88차 성체대회를 하면서 110년 만에

꿈에 그리던 성모님순례지선포식을 가졌습니다.

하늘에 계신 임 가밀로 신부님도 기뻐하셨을 것이고

아마 임 가밀로 신부님을 통하여 감곡의 이야기를 들으셨던 소화데레사 성녀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그날 우리는 성모순례지 선포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바쳤던 묵주기도 약 600만단을 봉헌했습니다.

원래 우리 목표가 1억단이었어요.

1억단이 채워질 때쯤이면 성모순례지가  선포가 되겠다 했는데, 놀랍게도 600만단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 성모순례지가 선포되게끔 하느님께서는 안배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성모순례지가 되었다고 순례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순례지에 걸맞게끔  해야 할 일들이 태산 같습니다.

영성적인 면도 있고 외적인 면도 그렇고 너무너무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신자들은 이제 순례지 되었다~~해서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더욱더 순례지에 걸맞는 모습으로 신자들도 거듭 나야 되고

외적으로도 순례지에 걸맞게끔 발전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은 영리하지도 않으셨고, 영악하지도 않으셨고, 똘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늘 손해를 보라는 식의 말투였고, 져야 된다고 하셨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많은 능력을 그냥 놔두시고...

사형수들의 피를 말려 죽이는 그 십자가형에 세상을 떠나신 겁니다.

그 때 당시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한 사람의 죽음이 20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예수님의 영성을 저는 크게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 세 가지의 영성은 거듭거듭 들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뼛속 깊은 곳에 박아서 우리가 이 세상의 싸움과 살 때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이 세 가지 영성의 진수를 꺼내서 살아야 됩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 가지 영성은 첫 번째가 바보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계산을 하면서 사시지 않았고, 영리하지도 영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바보도 그냥 바보가 아니라 참으로 큰 바보처럼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큰 바보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내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따르고 모시는 주님을 바보로 부른다면...그 분을 르는 사람들은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 주님이 바보처럼 살았으니 나도 바보처럼 살아야지....

그러나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보들이 모여 있는 성당은 가두선교 안 나가도 예비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동네에서 예수님 닮은 바보처럼 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저 사람은 세상의 복과는 반대로 살아 가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 말은 못 믿어도 성당에 다니는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다...

저 사람은 겸손하다!

그래서 바보들만 모여 있는 본당은 비록 조립식의 성당이라 하더라도 따뜻합니다.

바보들만 모여 있는 평협회는 늘 일치가 되고 화기애애합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본당의 간부들의 모임은 중구난방입니다.

다 예수님보다 잘 났고 다 저 인간보다 잘 났기 때문에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분열...수많은 파가 생깁니다.

바보들만 모여 있는 쁘레시디움은 몇 개월 안 돼서 분가를 시킬 정도로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바보들만 모여 있는 공소는 이방인들이 자꾸  몰려듭니다.

그러나 잘난 인간들만 모여 있는 공소는 폐허가 됩니다.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가정은 단 둘이만 살아도 일년 내내 싸움과 남의 탓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보들만 모여 있는 가정은 10식구가 넘는 바보가 모여 있을지라도 늘 찬미와 기도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영성은 바로 바보의 영성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영성은 걸레의 영성입니다.

수 백년, 수 천년 전부터 집안의 더러운 것을 닦기 위해서 걸레는 필요했습니다.

100년, 200년 전자레인지 냉장고는 없었어도 걸레는 옛날부터 항상 곁에  있어 왔습니다.

걸레가 존재하는 이유, 더러운 것 닦아주는 그 목적은 천 년 전 걸레나 지금 걸레나 변함이 없습니다.

걸레를 함부로 대한다고 걸레가 우리를 고발하지 않고 항의하지 않습니다.

마당에 빗자루질 하다가 빗자루 휙 내던진다고 빗자루가 벽에 부딪히면서 비명 지르지 않습니다.

나를 어떻게 취급하던 간에 내가 더러운 것 닦았다고 하는 그것 하나 만으로 걸레는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큰 걸레였습니다.

당신의 삶으로, 보혈로 세상의 더러운 죄를 깨끗이 닦아 주셨고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은 분이셨지만 저렇게 매달려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들

걸레의 삶이 어떤 삶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뭡니까?

복잡한 삶이 아닙니다.

성당에 오는데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 있으면 그것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 걸레의 삶입니다.

화장실 들어갔더니 화장실 더럽다~~

물 떠다가 깨끗하게 닦아주는 게 걸레의 삶입니다.


어느 성당이던지 큰 일이 있으면 개수통에서 물에 손 담그고 일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상하게 한복 차려 입고

'주교님, 난 써빙 하는게 내 특기야 ~~내 미모가 받쳐 주잖아'

그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삶이 낮아지는 걸레의 삶이라는 것을 절대 이해 못할 겁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있을 때 그 본당에 처음으로 부임해서 첫 미사를 드리고

제물을 정리하다가 본당 안에 아무도 없겠지~~

제의실 문을 나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자매 하나가 신자들이 놓고 간 주보를 가방에 쑤셔놓고 도망치듯 가는데 속으로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면 주보를 팔아다가 멀고 살까!’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녁 미사 시작하기 전에 하루 종일 다림질한 그 주보를 몰래 갖다 놓고 갔습니다.

그 자매는 그 일을 한 주 두 주 하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걸레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보든 안 보든 하느님에게 희생을 바치는 겁니다.


제가 청주본당에 있을 때 그 본당이 터가 아주 넓었습니다.

복대동이라고 하는...솔밭도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짖꿎느냐~~ 하면 일요일 새벽이면 신자들이 오기 전에

성당 입구에서부터 문앞 까지 언덕에다가 쓰레기를 쫘~악 뿌려 놓고 솔밭에 배 깔고 엎드려서 망원경으로 봅니다.

누가 과연 쓰레기를 주으면서 올라갈까~~

본당 회장이 올라 옵니다

그래, 오천명 평신도의 대표인 저 인간이야 말로 그래도 쓰레기 줍고 올라가겠지~~

웬걸, 지 주머니에 있는 것 꺼내놓고 갑디다.

실망 ~~실망·~ 왕실망~~~

그 날 오전 내내 액션단체 장들이 올라가면서 쓰레기 줍는 인간 하나도 없었습니다.

빗자루 들고 내려와서 그것 치우고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누가 그 쓰레기 줍고 올라가느냐~·~

지팡이 짚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올라가다가 (허리가 꼬부라지셨으니 쓰레기가 잘 보였겠지요~~)주저앉아서 속치마에 그것 다 주워서 한 웅큼 움켜쥐고 라이타 하나 빌려서 소각장에 가서 그것 불을 지피고 올라가더라~~

걸레의 삶은 바로 그겁니다.

본당총회장  수십년 되고 ~~세례 받은 지 50년 60년 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영성은 걸레가 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건 허수아비요, 몸뚱아리만 신자이지~~

예수님의 삶은 전혀 느껴보지 못했을 겁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영성은 연탄불의 영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시커먼 연탄에 불을 붙이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필요합니다.

불 붙은 놈이 시커먼 놈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불붙은 놈이 잘난척 하느라고 새카만 놈 위에 올라가면 시커먼 놈이 불이 안 붙을 뿐만 아니라 불붙은 놈마저 꺼져 버립니다.

그러나 불붙은 놈이 자기의 열을 끝까지 끊임없이 전달하려면

비록 무겁지만.... 등짝이 휘지만...  때론 밸이 꼴리지만... 자존심이 상하지만......

며느리 밑으로 기어 내려가야 되고

사제는 신자들 밑으로 내려가야 되고

아내는 남편 밑으로 기어 내려가야 되고

부모도 때로는 자식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어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권력의 대한 의지는 그 좁은 가정 안에서도 아이들 둘 사이에도 눈에 불이 납니다.


연탄에 불을 붙이려면 첫 번째 조건은 불붙은 놈이 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 구멍이 맞아야 합니다.

19공탄, 32공탄... 다 구멍이 맞지 않으면 불길이 위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구멍을 맞혀야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눈높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내가 이렇게 거룩하게 높은 곳에 있으니 너희들이 여기까지 올라와라~~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려오셔서 시궁창에 발이 빠져서 같이 꾸정물을 뒤집어 쓰시고

쓰러져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팔짱을 끼고 끌고 무릎이 까지고~~

힘드시지만 우리를 끌고 올라오시는 눈높이의 사랑이었습니다.

구멍이 맞지 않으면 절대 불이 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눈높이의 사랑이었습니다.


두 번째, 구멍이 맞지 않으면 불이 붙지 않습니다.


 세 번째 불이 붙으려면 젖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연탄에 물기가 있으면 햇빛 잘 나는 때 말려서 땝니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갔고 구멍도 맞혔고,  말렸는데~~

아주 보송보송한데도 위에 놈이  불이 안 붙어~~

불기가 시원치 않아서~~

그러면 탄과 탄 사이에 뭘 집어넣습니까?

번개탄, 또는 숯을 집어넣습니다.


우리 맨 정신으로는 며느리한테 ‘아가, 잘못했어~·'

이 말이 안 나옵니다.

같은 레지오 단체 한테 내가 상처 준 것 내가 잘못한 것 뻔히 알면서도

맨 정신으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그동안 소홀히 한 것 용서하십시오!

그 말이 안 나옵니다,

며느리에게 사과를 청하고 싶은 맘이 안 생깁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밑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불을 붙여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에 사로잡히면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헛되고 헛된 겁니다.

며느리 발바닥인들 못 핥겠습니까?

며느리 업고 돌아다니면서 춤인들 못 추겠습니까?


그 근엄한 다윗왕이 성령에 취하니까 지 팬티끈 풀어지는지도 모르고 춤을 덩실덩실 춥니다.


성령에 취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하는데 내가 오년이 걸렸구나!

하고 나니까 이렇게 행복하고 저 양반도  저렇게 좋아하는 걸....

그 상처가 무슨 신주단지라고 끌어안고 살았구나!

<용서하십시오> 그 말 한마디 하는데 십년이 걸렸구나!

다 뽑아 버리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첫 번째 바보의 영성, 두 번째, 걸레의 영성

세 번째가 연탄불의 영성...

연탄불이 붙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크리스찬영성의 믿음의 출발은 섬기는 겁니다.

섬김의 영성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들 섬길 때 행복합디까? 섬김을 받을 때 행복합디까?

누구를 섬길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겁니다.

봉사할 때 행복하지~~

봉사를 받을 때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낮아질 때 행복하지...높이 기어 올라오려고 할 때는 적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영성은 포기의 영성입니다.

기적은 언제 일어나느냐?

포기할 때 일어나고, 행복은 언제 가중이 되느냐?

포기하는 만큼 행복은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 안에 불편하고 아직 평화가 없다면.....

99% 이유가 아직도 내게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유럽의 어느 성당에서는 예수성심 대축일, 성모성심 대축일이 되면 성당에서 기르는 당나귀의 등에 예수님 성화를 모셔놓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앞에다 향을 피우면서~~

그러면 동네가 다 천주교신자들이다 보니까 예수성심상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면 성호를 긋고 예수 성심 상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란 놈이 착각을 한 겁니다.

‘내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라 내가 지나다니기만  하면 절을 하는 구나!’

어느 날 본당 신부님이 당나귀를 끌고 등에다가 예수성심상을 얹지 않고 지나가는데 아무도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 깐에는 표시를 한다고 히힝~~하면서 뒷발질을 하고...그러니까

“이놈이 미쳤나~~” 하면서 돌아오는 건 몽둥이세례 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할 때만이 으뜸이 될 수 있습니다.

with GOD!

그분과 같이 있을 때 우리는 들어 올려 집니다.

성서에 보면 제자들이 자리를 놓고 싸움을 합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라고 그랬습니다.


사제가 존경받을 때도 ‘아. 신부님과 예수님이 함께 있다!’ 할 때 사제를 존경합니다.

우리 신부님 안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어 할 때

<나 존경해라! >오만 폼을 다 잡아도 절대 존경하지 않습니다.

 

교우들이 이방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때는 십자가와 지겨운 그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때 세상사람들은 의문을 던집니다.

무슨 힘이 저 사람을 내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기쁘게 할까?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동맥을 끊고 자살시도를 했어도 수십 번 했을 텐데...

저 사람은 나보다 수십배 고통 가운데 사는데도 무슨 힘이 저 사람을 저렇게 강하게 만들까!'


의문을 주고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체험하게 합니다.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들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말씀드린 이 세 가지 영성에 젖어 들어야 합니다.

바보처럼 살아야 되고~~

영적 걸레처럼 살아야 되고~~

연탄불의 신비를 깨달아야 하고~~

이럴 때 하느님은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