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토록 하느님만을 위하여...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탁월한 대 신학자로 손꼽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는 1225년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아퀴노의 대지주였던 란돌프 백작이었으며 그는 일곱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영특한 아들에 대한 기대가 하늘을 찔렀던 아버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나이가 불과 다섯 살 되던 해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보냅니다. 그는 거기서 9년 동안 기초 학문을 연마했으며, 1239년에는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법이며 논리학, 수사학이며 기하학, 천문학 등을 배웁니다.


부모와 친지들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일취월장을 거듭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당시 체계가 잘 잡혀있고 빛나는 미래가 보장된 베네딕토회에 남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설교와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합니다.


이를 알게 된 가족들은 크게 분노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강제로 귀가시키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에 수도회 장상들은 비밀리에 그를 파리로 피신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파리로 가는 도중 투스카니란 지역에서 형들에게 붙잡혀 몬떼 산 조반니의 한 성에 2년간이나 감금됩니다.


갖는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토마스 아퀴나스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파리로 가서 당시 철학과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의 못자리였던 파리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부 성 알베르토 마뉴스(Albertus Magnus)를 만나 학문의 지평을 더욱 넓히게 되지요.


125530세의 나이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2년 뒤 당대 탁월한 신학교수가 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폴리, 로마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명 강의를 하게 됩니다.


1259년부터 1268년 사이에 그 유명한 ‘Summa Teologica’(신학대전)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 신학대전은 가톨릭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명 저작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신학대전을 읽을 때 마다 드는 느낌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논리적으로 때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하느님을 탐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평생을 오로지 하느님과 통교하고, 하느님을 묵상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며,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하느님에 대한 글을 쓰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반증이겠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과 접목시켜 신학을 체계화해나가면서 하느님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정말이지 경이롭고 또한 제 개인적으로 부끄럽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논리학, 형이상학, 인간학, 다양한 부류의 철학, 그리스도론, 하느님 존재에 증명...딸리는 머리로 몇 백번 읽고 강의를 들어도 알쏭달쏭했었습니다. 철학을 신학에 접목해서 하느님 존재를 설명해나간다는 것, 정말이지 힘겹고 지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큰 기쁨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하느님께 바쳐진 희생과 헌신의 길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본질과 실존이 동일한 분이며 하느님만이 가장 완전한 분, 하느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명확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성을 주도면밀하게 구분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서로 다른 두 갈래 길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앙과 이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보완하며 결국 동일한 결론인 하느님께 도달하는 두 길로 봤습니다. 이성은 신앙의 진리를 설명함으로서 신앙을 수용하도록 인간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1273106일 미사 중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이후 그는 절필을 선언합니다. 아직 신학대전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비서가 요것까지만 마무리 짓자고 거듭 권유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내가 써왔던 모든 것은 찌푸리기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신비체험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을 극도로 낮춥니다. 자신의 저작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하면서 저술을 포기한 채 기도와 헌신의 날을 보내게 됩니다.


1274년 그레고리오 10세 교황께서는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의회 교부로 초대되어 길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리옹으로 가던 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가까운 시토 수도회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병자성사 전 마지막 고해성사를 집전했던 한 사제는 고해가 끝나고 나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49살이었지만 그의 죄는 5살 먹은 어린아이의 죄와도 같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티 없이 맑은 삶,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 뜨기 직전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에게 남긴 말은 까마득한 세월을 건너와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굳게 믿으며 그분의 사랑 때문에 연구하고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항상 그분을 올바르게 전파하고자 노력했고 그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자 노력해왔습니다. 혹시라도 제 가르침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저의 무지 때문입니다. 겸손되이 청합니다. 제 가르침 가운데 그릇된 오류는 후세의 여러분들이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에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회학자로, 1880년에는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모든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며 에테르 파트리칙서까지 반포하였습니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이글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글입니다. ( 마리아 사랑넷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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