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뵈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 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

( 욥 1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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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배제한 인생에서 참 의미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하느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 세속적으로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하느님 없이 이루어지는 삶은 궁극적으로 허망함만 남는다.  삶의 의미는 왜 주님과 함께할 때 오는가?

그리스어 '열정'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열정이란 그리스어 엔테오스에서 온 영어 단어 enthusiasm은 '하느님 안에 머물다.'이다. 우리가 하느님안에 머물면 어떤 처지에 처하든, 어떤 어려움을 겪든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가족과 생이별하고, 집과 재산을 빼앗긴 채 강제수용소에 끌려간다. 그는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고 그동안 써온 '로고테라피'(의미 추구를 통한 치료)를 완성하려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글 쓴 것을 빼앗긴다. 외투 속 깊이 감추어 두었는데 그만 발각된 것이다. 엄청난 고통 가운데 유일한 삶의 의미인 정신적 산물을 빼앗기자,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벌거벗은 몸뚱이만 남은 상황에서 절망하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이 오묘한 방식으로 그를 찾아 오신다. 가스실에서 처형된 사람의 누더기 옷을 배급받아 갈아입던 중 위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에 적힌 성경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 6,4-5)


이 말씀을 읽고 프랭클은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찾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험악한 처지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갈 힘을 얻는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은 사람은 어떻게든 고통스런 처지를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실 프랭클이 말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는 바로 하느님이다.

엔테오스 곧 열정이란 단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 주님 안에 머물러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 삶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체험하듯이 성경에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구분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참된 것으로 본다. 이는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물 얘기가 대부분 그들의 출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때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베드로 얘기가 그렇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 땅에서 하느님께 두 번째 부르심을 받는다. 하지만 그전에 아브라함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얘기하지 않는다. 75년이라면 긴 세월이다. 이와 같이 베드로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지만 그 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얘기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결혼해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산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왜 얘기하지 않을까? 아브라함과 베드로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구약 백성의 바위가 된 사람이며, 베드로는 신약 백성의 바위가 된 사람이다. 이렇게 중요한 두 인물의 전반부 삶을 왜 우리에게 얘기 않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의 삶은 온전한 의미에서 완전한 삶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오죽하면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본명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녀가 되면서 받은 이름을 본명이라 하는가? 그때부터 하느님 안에서 온전한 삶이 시작되기에 참된 삶을 위해 받은 이름을 본명이라고 한다. 그렇다. 한 사람의 진정한 삶은 하느님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우리가 이 세상 존재하는 63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때 우리 삶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가 부르심의 삶에 응답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출처: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 분-송봉모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