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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 27일) 교황청 시성성이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1821~1861)을 가경자로 선포했습니다!!!!

'가히 공경할 만한 분'이라는 뜻의 가경자(可敬者)는 복자나 성인처럼 공적 공경의 대상은 아니지만 영웅적 덕행의 삶을 살았음이 인정되는 때부터 붙이는 칭호입니다.

순교자인 가경자는 시복식과 함께 복자로 선포되지만, 증거자의 경우 가경자가 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증거자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실이 입증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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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얼마 전 한 할아버지께서 왜 성지이름이 서양여자이름이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배티는 배나무배, 고개티입니다.

정확하게 한문으로는 배나무이, 솟을치인데, 이치가 어려워 배티로 바뀐 순 한글이름입니다.

어려웠던 춘궁기 이 곳 교우촌 신자들은 돌배를 따먹으며 연명했답니다.

그래서 천장, 스테인글라스 모두 배티성지 문양인 배꽃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는 충북, 경기, 충남 3개도가 모인 접경지역으로 차령산맥의 줄기의 깊고 높은 산입니다.

해도 빨리 떨어지고 맷돼지, 고라니 같은 짐승도 돌아다닙니다.

충북 충남 경기에서 박해를 받으면 제일 깊은 이곳으로 몰린 겁니다.

그러다보니 교우촌이 15개나 만들어진 겁니다.

성지 다니시다보면 군데군데 쉼터가 있고, 그 이름은 교우촌 이름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이름, 용진골, 동골, 삼박골, 은골 쉼터등.

교우촌은 1.5키로 2키로, 멀리는 7키로까지 뚝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만이 다니는 비밀 통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여기를 ‘동양의 카타콤브’ 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분들이 세상 것, 재산 지위 다 버리고 이 깊은 산속에 모여 살았던 이유가 뭐겠습니까?

뭐 지키려고 온 거겠습니까?

신앙. 정답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엇인가?

순교영성의 차원에서 믿음은 이렇게 정의가 됩니다.

‘죽기까지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

군더더기 따 떼어버리고 이렇게 한 줄로 표현이 되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은 태산보다 더 높습니다.

 

옛날 잡혀온 천주교 신자나 끌고 온 포졸이나 한 동네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보던 친구들 살리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아, 끌려 나가거든 십자가에 침 뱉어, 그러면 다 살려주겠다고 약조가 돼 있어.’

‘일단 뱉고 나가서 그 천주학인지 뭔지 믿으면 되잖아? 밖에 있는 애들 살려야 될 것 아닌가?’

그래도 안 뱉었어요.

비록 내 목이 잘려지더라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내 새끼 거두어 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거죠.

 

미사 후 인도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길쭉하게 생긴 순교현양탑을 만나게 됩니다.

그 돌은 신자들을 죽이러 끌고 갈 때 밤새 붙들어 매어 놓았던 돌입니다.

그 돌에 묶여서 신자들은 밤새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또 박물관을 가시는 다리 건너기 직전에 형구돌이라 하는 두 개의 돌이 있습니다.

앞의 구멍이 크고 뒤의 구멍이 작습니다.

우리 교우들 목을 부러뜨려 죽일 때 썼던 돌입니다.

목을 줄로 감아서 구멍으로 빼서 포졸들이 힘차기 잡아당기면 연필 부러지듯이 똑똑 부러져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앞의 교우가 목이 부러져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 가는데, 뒤에 차례를 기다리는 신자들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습니까?

죽기까지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는 거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것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순교영성을 내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던 15개 교우촌의 신자들은 죽기까지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버티고 살았습니다.

 

이곳은 조선 전체 교우촌 127개 중 15개가 있는 가장 큰 교우촌이었어요.

그리고 한국 신부로는 처음 방인사제로 최양업 신부님이 이곳에 부임을 하십니다.

물론 최양업 신부님이 오시기 전에도 서양 신부님들이 이 배티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배티는 한국의 첫 번째 본당이 됩니다.

 

최 신부님은 부임 후 15개 교우촌 뿐 아니라 조선 전체 127개 교우촌을 혼자서 사목하십니다.

밤에만 산길로 걸어 다니셨는데 그 걸어 다니신 거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1년에 7천리씩, 11년 6개월을 걸어 다니신 거리를 합치면 9만리가 나옵니다.

이렇게 다니셨어도 전국에 있는 흩어져 있는 교우들은 최양업 신부님을 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신부님 언제 오십니까? 신부님을 찾는 양들의 목소리만 전국에서 울려 퍼졌죠.

최양업 신부님은 양 하나라도 더 만나기 위하여 잠을 포기 하십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에 삼일이상을 자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 사흘을 자고 버티겠습니까?

 

여러분, 잠 마귀가 공격하면 강하게 구마기도 하시면서 최양업 신부님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탄(잠마귀)아 물러가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거라.”

 

솔직히 감곡을 떠나 6년 전 2010년 8월 이곳에 왔을 때, 최양업 신부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곳 와서 최신부님이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저는 참 여러 번 울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큰 사제를 모르고 살았구나!

가톨릭 2000년 역사 동안 수많은 사제가 살다가 갔는데

1년에 7천리를 걸어 다니고 한 달에 3일을 자고 9만리 길을 걷다가

길에서 과로로 돌아가신 사제를 내 상식으로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입니다.

‘서양에 바오로 사도가 계시다면 우리 동양에는 최양업 신부님이 계시다’.

이렇게 큰 사제, 한국 신자들이 먼저 알아야 되고 한국 백성 나아가서는 전 세계 신자들이 알아야 된다.

그러려면 시복만이 아니라 시성까지 가야만 그 분의 축일이 정해지고 전 세계 신부들이 최양업 신부님의 기념미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던 해부터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기원하면서 최양업 신부님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분이 앉아 계신 기념대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최신부님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최양업신부님의 순교박물관을 지었습니다.

하나하나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서, 물론 시복 전에 가경자라고 하는 산이 있었죠.

 

2년 전에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배티 출신 열 분의 시복을 청했는데, 아홉 분은 복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꼭 되실 줄 알았던 최양업 신부님이 누락이 된 겁니다.

누락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순교 못했다는 거지요.

한국 천주교회사는 선교지역이다 보니까 주로 순교자를 위주로 복자와 성인이 만들어집니다.

본격적으로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하게 불과 20년 전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최양업 신부님의 이름도 몰랐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난 26일 날 교황님은 알바니아 공산 치하에 순교한 38명을 시복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두 번째 사제, 놀라운 덕행을 보여준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시성에 이르시게 되면 순교하시지 않으신 분으로는 한국에서는 처음일 겁니다.

그리고 가경자라는 칭호를 받으신 것도 한국인으로는 처음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가경자 되셨다고 기도 놓지 마시고 지금부터 더욱 기도에 매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깊은 겁니다.

최양업 신부님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각 분야의 선각자 또 앞서 가는 마인드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고민 중에 하나는 그 분이 떠나시면 한국 신부의 대가 끊어지는 겁니다.

최신부님은 똘똘한 소년들 셋, 빈첸시오. 바울리노, 사도요한을 선발합니다.

그리고 두 칸 자리 초가집에서 소신학교 문을 열고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신학, 철학, 서양언어, 서양음악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1854년에 말레이시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유학까지 보내지만,

풍토병에 걸려서 세 아이들 가운데 사제가 된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님의 염려대로 긴 세월동안 세 번째 사제가 안 나온 겁니다.

여러분께 숙제를 내드립니다. 집에 가서 검색해 보십시오.

한국의 세 번째 사제가 몇 년도에 어디에서 몇 명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는가?

 

최양업신부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배티에는 서양신부님들이 계속 오십니다.

65년동안 들키지 않고 잘 유지된 배티는 마지막 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이 땅에 묻히게 됩니다.

이 배티골에만 20분의 유골을 찾아내어 14인과 6인의 무명순교자 묘가 있습니다.

리플렛 맨 뒷장을 보면 성지안내도를 참고하셔 하나하나 잘 짚어 가셔야합니다.

이렇게 배티는 4가지의 영성을 갖고 있습니다.

천주교신자들의 비밀교우촌이 있던 곳이다.

최양업신부님의 땀과 신앙이 어려 있는 곳이다.

한국의 신학교가 열린 곳이요, 가톨릭 대학의 효시이다.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순교자들의 본향이다.

 

영성으로부터 반드시 은사가 나와야합니다.

여러분을 불려낸 이유는 4가지의 은사를 주시기 위합니다.

첫 번째로 배티는 영과 육이 치유되는 치유의 은사가 강한 곳입니다.

두 번째 구마의 은사가 강합니다.

성지는 빛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내안에 어둠이 깊어도, 어둠은 빛을 못 이깁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길을 하고 이 땅을 밟을 때마다 여러분의 영을 괴롭히고 있는 그 어둠들이 밀려나갈 겁니다.

‘아멘’ 좀 하세요. ‘아멘’은 미래진행형이 아닙니다.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그 말씀 듣는 순가 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 성지에서 주는 은사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믿음의 은사라는 것은 가슴속에 인간을 걷어내고 하느님으로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릴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가득 차있으면 동네 느티나무처럼 사람 가리지 않고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또 그 전에는 심판, 벌도 내가 내렸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공의로움을 믿기에 상처를 받고도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게 바로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바뀌어가는 겁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느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갑옷을 입는 겁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은사는 순교의 은사를 주실 겁니다.

목이 잘리는 순교이전에 우리는 많은 영적순교를 해야 합니다.

많은 영적 순교 훈련의 첫 단추는 ‘분노할 때 참는 것’과 ‘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외 기쁘게 봉사, 순명, 봉헌하는 것도 순교입니다.

저녁에 식구들에게 눈을 마주치며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것도 큰 순교입니다.

하루에 수십 번 찾아오는 순교할 기회에 영적순교를 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주십니다.

 

치유, 구마, 믿음, 순교의 은사, 이 네 가지의 은사, 열매가 여러분들이 챙겨갈 것입니다.

 

배티를 다녀가신 분들에게는 동시에 의무가 부여됩니다.

첫 번째는 기도의 의무입니다. 최양업신부님 시복시성기도문을 매일 바쳐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애덕의 의무입니다. 배티성지를 깨끗하게 써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남자형제분들 성지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순교하는 마음으로 금연을 해주십시오.

마지막은 봉헌의 의무입니다.

저희 배티성지의 만명천사가 되어주세요.

그분들에게는 매일같이 가정미사를 봉헌해드립니다.

만원은 만원의 가치가 아니라 소년이 봉헌한 오병이어처럼 큰 힘이 될 겁니다.

 

배티는 최양업신부님과 뗄 수 없습니다.

오늘 특별히 가경자되심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앞으로 최신부님의 시성기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려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마 천국에서 이 미사를 내려다보고 계신 최양업신부님, 그 옆에 계시는 김대건신부님,

또 이곳에 살다가 순교하신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 미사를 향하여 힘을 모아주시고 계실 겁니다.

미사 때 치유와 구마가 일어나고, 믿음의 갑옷을 입게 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의 지위에 머무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 2016년 최양업신부님 가경자선포 감사미사 (5/1)강론- 배티성지 느티나무신부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