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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화한 청춘들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의인(義人)들과 희생자들, 유가족들 앞에 너무도 염치가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날은 침묵과 성찰 속에 보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분’께서는 티끌만큼의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하시는 말씀, “광주 가서 내가 뭘 하라고? 나는 광주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야.” 또 여기저기 어르신들께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문제로 시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불러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얼마나 감동적이고 눈물 나는 노래인지 모릅니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고뇌하고 행동하던 한 애국 청년의 삶이 담겨있는 숭고한 노래입니다. 정권욕에 사로잡혀 물불 안가리던 독재자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온 몸으로 저항하던 한 청년의 고귀한 삶과 죽음이 들어있는 노래입니다.

 

광주광역시 북쪽 외곽에 저희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살레시오중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윤상원 요한 열사가 바로 살레시오고등학교 8회 졸업생입니다. 1950년생이시니 아직도 살아계신다면 66세로 한참 활동하실 연세이십니다.

 

윤상원 요한 열사는 5월 민주화 항쟁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월 항쟁이 발발하자 ‘들불야학’ 동료들과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투사회보’ 제작배포,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는 한편, 수습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마지막까지 항거하다 계엄군의 총에 산화하였습니다. 당시 나이 30세였습니다.

 

민주화 항쟁의 취재를 위해 건너온 미국인 블레들리 마틴 기자는 참혹한 진압이 발생하기 하루 전 윤상원 요한 열사를 직접 만났는데,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서른 살 정도에 광대뼈가 나온 지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습니다. 바로 코앞에서 임박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은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윤상원 요한 열사가 남긴 한 마디 한 마디 말 앞에 너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나라와 민족, 민주주의와 백성들을 향한 그 애틋한 마음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나는 도대체 무엇 하나 한 것이 있는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벽 4시경, 진압군들의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윤상원 요한 열사는 그간 동고동락했던 동지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저승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합시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그동안 투쟁은 헛수고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불의에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모교 동문들이 윤상원 요한 열사의 숭고한 삶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살레시오중고등학교 성모동산 한 쪽에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성모님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님 옆에 윤상원 요한 열사가 자리 잡은 것입니다.

 

윤상원 요한 열사의 어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느낌입니다. 동시에 큰 여운을 남깁니다. 그가 그만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내면은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국심,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으로 활활 타올랐다는 표시입니다.

 

“역사를 참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윤상원 열사가 군복무 중이던 1974년 아버지께 보낸 편지를 통해 그의 불타는 애국심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제가 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윤상원 요한 열사가 27세였던 1977년 5월 27일에 썼던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해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점점 나태해져서야 되겠느냐. 해처럼 열기를 품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아무 것도 한 것 없는 나, 역사에 무임승차 한 우리 모두 크게 가슴 치며 이 5월 한 달을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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