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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하느님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 직접 뵈옵는 천국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신앙인으로서 지복직관처럼 더 큰 은총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강조합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지복직관의 은총이 다가올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코린토 1서 13장 12절)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은혜로운 지복직관의 선물이 살아생전 주어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의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시메온이 그랬습니다. 그는 얼마나 경건하고 충실한 신앙인이었던지 성령께서 항상 그의 머리 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시메온이 성령의 은총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던 중 그토록 염원하던 지복직관의 은총을 입습니다.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온 것을 시메온이 발견한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메시아 하느님,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평생소원이었던 지복직관을 만끽한 시메온은 이제 더 이상 소원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크신 주님 은총에 시메온의 입이 열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에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장 29~30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메온이 누렸던 ‘살아생전 지복직관’이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죄인인 우리에게 ‘살아생전 지복직관’ 그게 가당하기나 하겠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더군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때 마다 우리가 영하는 빵과 포도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매일의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좀 더 잘 준비하고, 좀 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한 후,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할 때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룩한 영성체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좁디좁은 대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죄로 얼룩지고 때로 비참한 우리 몸이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 내 육신이 예수님께서 머무시고 사시는 지성소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우리 인생이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미사를 봉헌하십시오. 미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구엔 반 투안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