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일종소리가 울리던 날

                                                 글 : 손용익 그레고리오 선교사

 

고요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은은하게 들려오던 성당의 종소리

이제는 어디를 찾아봐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을 비추기 위해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이하려는 마음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찾기 위해

성탄을 소비광고의 모델로 둔갑시켜 휘황찬란한 광란의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러한 분위기에 현혹되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곳곳의 음식점에서 부라보를 외치기 바쁘고 백화점 안에서는

자신의 지갑이 털리고 있는지 모른 체 물건사기 바쁩니다.

이들이 거리에서 흥청망청 기분을 내고 있는 한편에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척박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의 기쁨이 가진 자들만의 축제인지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여야 하는지, 희석된 거리의 풍경으로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인정과 사랑이 메마르면 성탄은 일부 인들의 예식이자 축제가 될 뿐,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두운 암흑이 빛으로 인해 밝혀진다는 것은 익히 알듯이

우리 삶 안에 생명의 중시가 없고 사랑이 부재한다면

우리가 고대하던 강생의 신비는 더 이상 드러날 수 없는

무덤이 되고 맙니다.

진정 성탄의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술잔을 들고 부라보를

외치기보다는 작은 선물 하나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며

따뜻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랑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 날이면 양말 한 짝을 벽에 걸어놓고 잠들었던 소박함,

밤새 눈이 내리면 산타할아버지 감기 걸려 못 올까 걱정하던

철부지의 마음과 잠들면 산타할아버지가 지나친다는 말에

잠과 투쟁을 부리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이제는 찾아보기조차 어렵습니다.

 

성탄의 축제가 흥행에 빠지면 성탄절의 본질이 무너지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도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으며

겨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명맥을 이어갈 수밖에 없으며,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고 사랑이 부재한 곳에는 아기 예수님이

새롭게 오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할 때 주님은 새롭게 오십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경축을 뜻 깊게 하고

모든 이들의 경축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안에서 시기와 질투와 헐뜯기를 버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펼칠 때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며

모든 이들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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