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보미씨 글을 보고 저도 묵주기도에 관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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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 기도를 더 잘 바칠 수 있는 열쇠

몇해 전 나의 남편 빌이 심한 병으로 고생하며 도저히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나는 옆에 앉아 묵주기도(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충격과 실의 속에 빠진 나는 로사리오 신비나 내가 하는 말에 전혀 정신 집중을 할 수가 없었고 다만 마음 속으로 크게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오, 성모님, 제발 제발 제발 남편 빌을 살려 주십시오. 그가 살아나도록 당신 아드님께 간청해 주십시오."



새로운 의미

혹시 사람들이 내 기도가 분심 거리였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일생중 기도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매우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놀랍게도 나의 긴박한 기도는 기도하는 데에 새로운 의미를 찾게 해주었으며 로사리오 신비를 더 잘 묵상하도록 도와 주었다.

어느 날 거의 습관적으로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하고 말할 때 "이제"라는 말이 마치 북을 치듯이 "이제, 이제, 이제" 하고 내 가슴을 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남편 빌을 위한 도움을 원했다.

이제 - 지금 이 순간, 너무 늦기 전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남편 빌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라는 말은 많은 기도의 지향에 알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자주 위급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때로 내가 기도해 주어야 할 특별한 지향에 맞는 다른 말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 어떤 좋지 않은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즉시 후회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라는 말이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더욱 통회하고 더욱 자신을 다스리고 더욱 애덕을 베풀어야 할 이 죄인, 나 자신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떤 가정이 조당에 걸린 결혼을 하고서 (가톨릭)교회까지 떠났을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하는 말이 내게 희망을 주었다. 그들을 끝까지 염려해 주시는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하느님과 가까우시므로 비록 불명확한 응답으로 살아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와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셈이다.

이 말은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그들의 긴급한 여려움을 모른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과 일치되어 계시므로 손자 녀석이 위험하거나 앓거나 한 것을 아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잘 되도록 해주신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그러한 능력은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라는 말에서 역시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마리아는,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찬사로, 진실로 천주(하느님)의 모친이라고 일컬어진다.

어느 날 나는 거울을 드려다 보았다. 어느덧 나의 눈 주위에는 주름살이 지는 슬픈 현상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로사리오(묵주기도)를 바칠 때 "...저희 죽을 때에" 라는 말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매일 늙어간다. 수많은 햇수와 시간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 죽음은 이미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만나려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언제 내게 다가올런지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저희 죽을 때에" 란 말을 할 때 나는 내 아버지처럼 조용하고 행복한 죽음을 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병원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침대에 허리를 굽히고 "여보, 잘 가요" 하고 말하자 아버지는
"난 죽는 거 두렵지 않아, 성모님께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하고 우리가 얼마나 자주 간청했는지 생각해 봐!"

로사리오(묵주기도)를 바칠 때 성모송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도 바친다. 이 때도 기도지향을 잘 어울리게 한다. 파티마 성모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애쓰면서 보통으로 러시아의 회개와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배상을 기도지향에 포함시키는데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소서!" 란 말을 연결시킨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는 말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과 연결시킨다. 특히, "철의 장막 뒤에서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소서" 하는 의미를 말이다.



로사리오 신비

지향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문에 대해서 뿐아니라 묵주기도의 매단 신비에 대해서도 생각하도록 인도해 준다. 내 남편 빌이 아팠을 때 비록 묵상은 제대로 못했었지만 고통의 신비 5단을 바치고 있었다. 그 후에 나는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성모님은 더구나 당신의 하느님이시며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는 성자께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심을 바라보고 계심을 나는 생각했다.

더구나 나의 남편 빌과 또 위급한 영혼들을 위해 은밀히 간청할 때 성모님처럼 성모님과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얼굴도 모르는 몹시 놀랄만한 외로운 과부들을 대해야만 할 때 환희의 신비 1단은 도와주었다. 성모님은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역시 성모님께 나 자신이 "예" 하고 응답하는 일이(Fiat) 이루어지도록 도아 주십사고 간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나 조금이라도 로사리오 기도문이나 로사리오 신비에 연결될 수 있기를 애쓰고 열망하게 되었다. 임산부인 내 조카 딸의 안전을 간구하게 될 때 환희의 신비 1단을 묵상하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또한 내 냉담한 조카의 회두를 간구할 때는 고통의 신비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고칠 수 없는 병에 신음하는 친구를 간구할 때는 영광의 신비에서 예수 부활과 승천, 성모 승천을 묵상하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다.

남편없이 혼자 외로이 사는 나 자신을 위한 용기와 힘을 간청할 때는 성령의 강림을 묵상하면서 더욱 잘 기도할 수 있었다. 세례때 이미 내 안에 성령이 오셨으며, 대죄로 성령을 내쫓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머무신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일깨워 준다. 그것은 결코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다." (시편 145, 18)

내가 성체를 영하려고 갈 때는 주님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받아 모신다. 그러나 영성체를 하든 안하든 하느님의 성령은 그 자리에 계신다.

더구나 상급으로 성령께서는 내가 묵상하려는 신비에서 나를 비추어 주신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성령

성령은 나의 위로자며 성화이시고 빛이시며 인도자,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 모든 기도를 영도하신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더 잘 바치려면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해야만 한다.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를 가장 잘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26)

계속되는 로사리오(묵주기도)가 더 큰 사랑으로 바쳐졌다면 그것은 두번의 로사리오(묵주기도)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췌:'마리아(maria)', 통권 43호, 메어리 리위스 고아클레이, 아베마리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