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독서 레위기 19,1-2.17-18.
제 2독서 코린토 3,16-23.
복 음 마태오 5,38-48.
제가 악기를 배울 때 거의 언제나 같은 곳에서 실수했습니다. 노래 하나를 가지고 연습을 하다 보면 실수했던 부분에 가까이 갈수록 분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악기는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여기서 틀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채우게 됩니다. 허튼 생각을 떨쳐버리고, 정신을 집중해도 맞을까 말까 한 실력에 그런 잡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잘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결국, 이상하게도 “틀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다른 곳보다 더 훨씬 자주 틀리게 되는 경우를 체험합니다. 악기를 연습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결심을 할 때에도 그 결심을 방해하는 일들이 보통 때 보다 더 자주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고기를 사주겠다는 약속은 꼭 육 날인 금요일에 만들어집니다. 맛있는것은 다이어트 결심 이후에 더 많이 보입니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보다 더 관심과 마음을 끄는 일이 생겨납니다. 그 전에 재미없던 뉴스가 시험을 앞두고서는 왜 그리 재미있는지.
이와 비슷한 일이 사랑과 미움에서도 일어납니다. 왜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것인지 그 미움을 떨쳐버리거나 극복하려 노력하면 왜 그 미움은 없어지지 않고 더 커지기만 하는 것인지? 상처와 원망은 왜 멀리 있는 사람에게서 생겨나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오는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고 하셨는데 원수는커녕 가까이사는 가족조차도 왜 이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
개인적으로 우리가 미움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미워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미움이라는 부담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요할 뿐 미움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워하면 안 된다 는 생각 자체가 이미 그 미움을 곱씹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든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든 마음은 이미 미움이라는 형식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려면 다른 형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나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위로와 상처를 줍니다. 미움은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미움은 그 사람이 한 말에 대한 나의 반응과 태도입니다. 미움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는 그가 없어지면 미움이 사라질 거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없어진다고 내 안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움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면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미움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는 ‘죄의 묵상’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서는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 죄가 미움이라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 이후로 미움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또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는지? 그 죄에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했는지? 하느님이 그 죄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우리는 흔히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한 착각은 자기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면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 오류, 실패와 잘못, 어둠, 부끄러움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낫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죄와 미움을 통해서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마음도 넓고 관대하고 능력 있고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의 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속 좁고 다른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내가 능력과 자격을 갖춘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은총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주님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우상 숭배 중에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심과 의견이 마치 삼위일체 주님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내 미움이 온 우주의 분노가 아니고, 내 상처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모아놓은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죄와 미움은 상황을 개선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분노와 두려움 미움 등과 같은 강력한 감정들은 우리 삶에서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한 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고 분노가 없다면 맞서 싸우지 않을 것 입니다. 미움은 어느 경우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우리는 불의를 불평등을 악을 부조리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미움은 개인의 신앙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 변혁시켜야 한다는 행동하라는 신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 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할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자신을 모두 비워낸 사람의 사랑일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랑의 길은 너무 멀고 아득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포기해야 할까요? 미워하고 분노와 원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우리에게 참 평화와 행복을 줄 수 있을까요? 결국 아무리 멀고 불가능해 보여도 사랑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가 때로 죄에 걸려 넘어지고 어둠과 무기력에 주저앉아 있을 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희망을 두고 우리 또한 그 사랑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집어 들고 내려놓든 간에 그 매일의 선택이 우리의 얼굴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자비를 실천하고 그분이 보여주신 그 거룩한 얼굴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