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사순 1 주일
제 1 독서 창세기 2,7-9;3,1-7.
제 2 독서 로마서 5,12-19.
복 음 마태오 4,1-11.
우리가 믿는 교리에서 실감하기 어려운 주제 중 하나가 "원죄"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죄라고 하면 내 행동과 말로 저지르는 오류와 잘못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한 그 결과로 이후의 모든 후손에게 드리워지는 결핍과 어둠으로 설명합니다. 원죄의 결과로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이 생겼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죄에 대해서 우리가 그리 실감하게 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여러 반론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 때문에 왜 내가 죽을 운명을 겪어야 하고, 고통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담과 하와, 그 두 사람이 저지른 일 때문에 인류 전체가 그 죄를 함께 뒤집어쓴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러한 벌을 내리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너무 부당한 책임을 강요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등등의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죄에 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류에게 왜 고통과 죽음이 생겨났는가?" 또 "인류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슈타인들 라스트(David Steindl-Rast) 라는 베네딕토 수도회 신부님은 원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원죄가 뭐냐고 물어와도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죄란 '고뇌'라고 부르는 인간의 보편적 현상을 그리스도식으로 칭하는 이름이라고요. 고뇌(Dukkha) 라는 낱말의 원뜻은 어느 축에 매달려 끝없이 돌고 있는 수레바퀴입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에는 뭔가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원죄와 고뇌….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의 실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합니다. 인간의 삶은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축에 매달린 듯 쉽 없이 끌려갑니다. 이렇듯 뭔가가 어긋났다. 우리의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제자리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식의 자각이 들면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불교나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 프리초프 카프라, D 슈터인들-마지막 / 김재희, (대화 문화아카데미, 2014).
고뇌(苦; Dukkha)는 우리나라 말에서는 단순하게 괴로움으로 번역됩니다. "뒤틀리고, 결함이 있고, 불만족스럽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의 현재 삶을 완전하고 흠 없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마다 뭔가 부족하고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것을 고(苦)라고 부르고,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1 독서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사람이 아닌 모든 남자와 여자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금지하셨지만, 인간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 그 열매를 함께 따먹고 눈이 밝아져 낙원을 잃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이 내용 중에서 두 가지 정도를 함께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열매를 먹게 되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죄의 본성으로 꼽는 것이 교만과 함께 태만, 게으름으로서 죄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빌리면 "뱀에게 맡겨두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뱀에게 떠넘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태만하게 뱀이 말한 것을 분별이나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태만으로서 죄는 자기 삶의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에 있습니다. 남에게서 들은 대로, 남이 가는 대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생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을 만들고, 나름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 우리는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다른 이에게 의존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그 분야의 전문가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 성공했다는 사람들,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맡겨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편이 많은 생각을 하고, 어려운 판단을 내리기보다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아는 사람을 말에 따라가면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고, 하느님도 잃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전문가나, 도덕적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상황에 맞는 조언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참고하고, 자신의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기꺼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뭐 그리 나쁜 것인가? 그것이 죽음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죄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로는 나쁠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를 사람이 긋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고, 이쪽은 좋은 편이고, 저쪽은 나쁜 편이고 하는 식의 경계를 긋게 됩니다. 그러한 경계를 만들고, 좋고 나쁨의 표시를 붙이는 순간부터 우리 삶에 이쪽과 저쪽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생겨납니다. 하느님은 경계가 없는 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의 구분에 매여있지 않고, 이쪽과 저쪽 사이의 편 가르기도 없으며,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가지셨지만, 세분 사이의 경계가 없으므로 하느님은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느님을 더는 닮지 않습니다. 나와 하느님 사이의 경계를 지어내고, 나와 남을 구분하고, 세상에서 선과 악을 갈라냅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와 하느님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눈이 밝아져 나와 남을 구분하고, 세상을 대상화해서 지식과 과학을 쌓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의 자신의 일부가 아닌 이용물로 여겨 심각한 공해를 만들었고, 다른 이들을 손쉽게 악으로 규정해서 단추 하나로 수십만 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의 하나는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이웃을 너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선악과를 먹인 인간은 나와 남을 구분하고, 이쪽을 선으로 저쪽을 악으로, 나를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주변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다시 낙원의 은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합니다. 눈이 밝아져 버린 인간이 그 눈으로 어디를 보아야 할까요? 선악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일까요? 죄의 어원은 Hamartia 표적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할 표적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과 시간, 노력과 관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요? 우리 매일의 발걸음이 항상 하느님을 향해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그 표적을 놓치지 않는 사순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