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대림 3주일

제 1 독서     이사야 61,1-2ㄱ. 10-11.제 2 독서     테살1서 5,16-24.복     음     요한 1,6-8. 19-28.
음악가 존 레넌(John Lennon)이 1971년에 발표한 "Imagine"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존 레넌은 이 노래를 통해서 자기가 상상하는 어떤 세상을 노래하고, 그 상상에 다른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가 상상하는 세상은 천국, 국가, 소유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는 천국이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것이고, 우리는 지옥에 대해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지나친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현재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을 거라 노래합니다. 또 국가 없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한 군대도,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도 없이 모두가 평화로워가라 상상합니다. 이 음악가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고, 지금도 즐겨 불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노래는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제도와 사고방식, 물질적인 기반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상반된 둘로 나누는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선과 악- 사고방식, 욕망과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적인 분위기,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며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 하느님을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 나라는 과연 무엇이 없는 세상일까요? 만일 그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이는 천국에 가지만 어떤 이는 지옥으로 쫓겨나는 세상이라면 만백성이 그분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그분이 가져다주시는 구원이 믿는 사람만, 특정 종교인만,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당하고, 다른 나머지를 배척하는 것이라면 그 구원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우리가 내 바람과 필요가 채워졌을 때만 하느님의 은총을 느낀다면, 더 나아가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차라리 알라딘의 마술 램프나 한도 무제한의 신용카드를 믿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옥을 전제로 하는 천국보다는 훨씬 더 큰 나라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 날라는 경계를 둘러쳐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나라가 아닙니다. 또 다른 생명은 버려진 채 오직 사람만 구원받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모든 땅과 모든 하늘,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나라일 것입니다.
흔히 기존의 질서와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제도와 권력이 등장하는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혁명은 정치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서 먼저 촉발될 수 있습니다. 왕이 지배하는 세상이 사라지고, 평민이 통치하는 세상이 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 또한 기존의 틀과는 다른 세상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꾸로 된 사고방식과 태도를 요구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 24-2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편안할 수 있는 권력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뒤집을 만한 메시지를 내놓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그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이 우리를 잘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그 선포를 작고 쉬운 것으로 왜곡시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러 경계 안에 갇혀 있는 자기만의 나라에 갇혀 있습니다. 그분은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산타할아버지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그분은 어둡고 초라한 구유에 누워 계시지만 우리는 화려한 백화점과 쇼핑에서 그분의 오심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외침을 작은 속삭임으로 바꾸어 버렸고, 그분의 가난한 자리를 화려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또 그분의 낯선 선포를 익숙하고 편한 것으로 변형시켜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계사 요한은 "왜 세례를 주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 26)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서 계신 낯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편하고 낯선 것입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이 세상에서 포기하고 내려놓는 사랑의 길을 너무 멀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내 요구를 채워주는 대신 내 마음을 비우라 하시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우리에게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화나는 경우는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준비 한 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이 틀어졌을 때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 도보 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모든 관광상품은 매일의 일정이 나와 있고, 그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 여행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 여행은 아예 계획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어디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 나머지는 이끄심에 맡겨야만 했습니다. 날씨나, 걷는 길의 상태, 만나는 사람, 묵어야 할 숙소와 식당 등 모두가 매일의 낯선 사건들이었습니다.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걷는 저에게 자신의 우산을 건네준 스페인 할머니의 손길에서 은총을 체험했고, 시골 작은 식당에서 마신 따뜻한 수프 한 그릇에서 모든 피곤을 잊을 만한 위로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그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만 진행된 여행이었다면 아마 위로와 배움도 적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은총과 이끄심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여행뿐 아니라 집에서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낯선 시간입니다. 그 하루를 계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하루가 실제 어떤 얼굴을 하고 다가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매일의 시간도, 그분의 가르침도, 그 하느님 나라도 우리에게 낯선 얼굴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익숙하고 낯익은 사람과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새로운 곳으로 이끄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로 서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족을 떠나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낯선 곳으로 떠났듯이, 우리 또한 그런 여행을 매일매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 음악가가 천국도, 국가도, 소유도 없는 낯선 세상을 상상하며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낯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익숙한 곳에서 안주하지 않고, 낯선 얼굴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