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제 1 독서 :  이사야 60,1-6.
제 2 독서 : 에페소 3,2. 3ㄴ. 5-6.

복 음 : 마태오 2,1-2.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르고, 볼 수 있는 것도 다릅니다. 그의 역량, 처지, 지향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깊이가 다르고, 시야의 넓이도 다를 것입니다. 악보나 수학 공식을 보더라도 그의 공부에 따라 이해하는 수준이 다를 것입니다.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를 듣는 그 심정이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숙련된 고고학자는 고대의 동전들을 별 어려움 없이 시대별로 알아맞힐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안목을 기르려면 얼마만큼의 공부와 경험이 필요할까요? 그래도 이렇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경우에는 시간과 노력에 따라서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또 실제로 보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본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이 사람들과 세상에 보이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존재는 황제나 천자였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었고, 볼 수 있는 신이었습니다. 지상에서 그보다 더 큰 권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그보다 더 큰 부자도 없었습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이 떠받드는 황제나 천자를 보며 신은 바로 저 모습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도 사람들은 신을 닮기 바랐을 것이고, 당연히 신과 비슷하게 부유하게 되고, 큰 능력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부유함이나 능력과는 다른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임금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화려한 왕궁이나 장엄하게 꾸며진 신전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곳은 새로운 임금과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신들이나 제사장들도 그 새 임금님에 걸맞은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새 임금님은 왕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고, 동방박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그분을 찾아, 경배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동방 박사들입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그분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에자르트 샤퍼가 지은 [네째 왕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이 3명이 아니라, 아무 선물도 하지 못하고 때를 놓친 4번째 사람도 있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합니다. 알 터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도 처음에는 다른 경배자들처럼 예수님께 드릴 보물을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보물들은 도중에 만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됩니다. 급기야 노예로 끌려가는 사람들 대신해서 노를 젓는 노예를 자청하게 되고 30년이 지나서야 항구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알 터번은 모든 것을 비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소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의 여행길을 좀 더 실제로 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는 여정에 서 있는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여행은 아마도 평생에 걸친 먼 길이 될 것입니다. 또 밤하늘의 별처럼 내 마음에도 가냘픈 희망과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을 찾아가는 지상의 여정에는 내 길을 가로막거나, 내 눈을 현혹하거나, 나를 이용하고 속이려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을 볼 수 있을까요? 그 과정에서 그분께 드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잃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 집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고, 보물도 내어드리고, 얻는 것도 별로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그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길을 떠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만남으로 그전에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것, 가진 모든 것을 드리고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을 받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그분이 이루실 구원에 대한 희망입니다. 욥은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강한 열 명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욥 19-27)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어쩌면 평생에 걸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 하느님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분을 만나러 처음에 왕궁에 찾아갔지만 엉뚱한 사람이 있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누워있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하느님을 만나더라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만남 후에 해야 할 일이라고는 다시 떠나기 전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의 삶은 다를 것입니다. 자기 알을 깨고 나와 날개를 펼친 새와 자기의 틀 속에 갇혀있는 알의 삶이 다릅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그분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빛 가운데서 따라나서야 할 빛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그 길을 끝에서 그분을 꼭 뵐 수 있기 바랍니다. 그분을 기대했던 장소와 시간에서 만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준비되어 있다면 그분은 분명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리면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그분께 의탁하는 믿음을 키워갈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