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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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독서 창세기 14,18-20.
제 2 독서 코린토1서 11,23-26.

복 음 루카 9, 11ㄴ-17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책 [호모 데우스](Homo Deus)에서 인류가 지난 수천년 동안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 3가지로 "기아, 역병, 전쟁"을 꼽고 있습니다. 그 중, "기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최근 까지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칫하면 생물학적 빈곤선 아래로 떨어져 영양실조와 굶주림에 처할 수 있는 상태로 살았다. 작은 실수나 사소한 불운으로도 일가족 또는 마을 전체가 줄초상을 당하기 일쑤였다. 폭우가 내려 밀농사를 망치거나 강도를 당해 염소떼를 잃으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식구들은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집단 수준에서 일어나는 불운이나 실수가 대규모 기아를 초래했다. 고대 이집트나 중세 인도에 심한 가뭄이 들면 인구의 5-10%가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식량은 동이 났는데 교통 수단이 너무 느리고 값비싸 충분한 식량을 수입할 수 없었고 정부는 너무 무력해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아무 역사책이나 잡히는 대로 들고 펼쳐 보라. 십중팔구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끔찍한 이야기와 마주할 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거르거나 종교기념일에 단식을 하거나 새로운 마법의 다이어트를 위해 며칠 동안 야채즙만 먹어도 괴롭다. 하물며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다음 끼니는 또 어디에 가서 때워야 할지 막막할 때는 어떨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지독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불쌍하게도 이런 고통에 매우 익숙했다. "우리는 기아에서 구해 주옵소서"라고 신에게 소리칠 때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김명주, (2015,김영사) pp16-18.

19세기에 일어난 인류 최대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 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1845-1852년 사이 7년 동안,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던 감자에 병이 돌아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영국인 지주들의 착취가 심해졌습니다. 그 기근으로 800만명 이었던 전체 주민 가운데 약 100만명이 죽고 100 만명이 고향을 떠나 해외로 이주했습니다. 그로 인해 아일랜드 인구의 20-25%가 줄어들었습니다. 해외로 떠나는 배 삯을 구한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배에 탄 사람들 중 60%가 육지에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배 안에서 죽었습니다. 한 영국 언론인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어린이들의 배는 (영양실조로) 곧 터질듯이 부풀어져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해 그들의 몸은 성한 곳 없이 터져있었고 (영양부족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마을은 황폐화 되었다. 그들은 영국인 대지주의 집 앞에 모여들어 식량을 요구했으나 곧 영국군이 그들을 쫓아냈다... 이곳은 지옥과 같았다." 문명화된 19세기 서구 아일랜드에서도 기근으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일상적인 가난과 굶주림은 훨씬 심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을 확률보다 오히려 비만으로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이곳에서, 구지 인류의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들추어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이 "성체 성혈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음식은 쾌락과 소비의 대상이지 내 삶을 위협하는 생존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굶주림을 겪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고민하는게 아니라, 메뉴 선택으로 고민합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어르신들이 겪었던 배고픔을 이야기 한다면 아마 공감을 얻기 어려울 거라 여겨집니다. 먹기 싫어서 배고픈 적은 있어도, 먹을게 없어서 굶주려 본적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셨을때, 빵에 대한 간절함을 몸으로 체험해 본 사람들은, 배고파 본적이 없는 우리보다 더 직관적인 이해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한 달정도 김치맛 못 본 한국 사람이 어느날 "김치"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그 새삼스러움과 그리움을 꽤나 큽니다. 반면, 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외국 사람이 "김치"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수살렘과는 달리 갈릴래아 지방은 가난한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확의 상당량을 세금으로 내야만 했습니다. 세금을 내야하는 곳은 로마당국과 지역영주와 성전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하고 굶주렸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위로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지도자 라는 사람들 조차도 자기 배를 불리기에 골몰하는 세태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서 감격스러운 위로를 느꼈을 것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인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빵을 많게 한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해석할 수 있고, 사람들이 각자 숨기고 있었던 자신의 음식을 이웃과 나눈 사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고 음식을 나누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고 전합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의 이 기적(마르 6,30-44)과 헤롯왕의 생일잔치(마르 6,14-29)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잔치과 헤롯왕의 잔치를 비교해서 읽어보도록 초대합니다. 헤롯왕의 생일에는 선택된 사람들만 초대되었고, 비싸고 귀한 음식이 나왔을 것이며 배부르게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잔치 중간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고, 그 댓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왕은 자신의 맹세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줍니다. 헤롯왕의 이 잔치는 모두가 함께 행복하고 위로하며 기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자격없는 이들은 내쳐지고, 그 안에서 서열과 차이를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이 사람들의 잔치는 댓가를 요구하고, 왕 마저도 체면을 생각해야하는 곳이고, 사람의 목숨을 댓가로 요구하는 살벌한 곳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만드신 그 자리는 버림 받거나 소외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배부르게 만족할 수 곳입니다. 권력의 순서대로 자리가 정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공평하게 둘러 앉는 곳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느 자리에 참하기를 원할까요? 권력에 가까이 가고 싶고, 신분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 조차도 사람의 목이 쟁반에 담겨 나오는 식사자리에 가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잔치는 일상적인 배고픔에 시달리고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모든 시름을 잊고, 몸과 마음 모두 배부르고 더 이상 아쉬움 없는 이 세상의 짦은 천국이었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 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또 그것을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빵과 포도주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과 예수님이 사셨던 곳의 기초적인 양식입니다. 우리 말에 "밥이 하늘이다"고 했습니다. 동학의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밥 한그릇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돈과 금을 먹고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칭찬과 인기를 누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밥과 국으로만, 빵과 포도주로만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살게 하시는 그 빵과 밥이 내 하늘입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때 하셨던 그 말씀을 새롭게 듣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시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전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고, 마셔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허전함을 잊기 위해서 배불리 먹고 마셔도 소용없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 허기짐과 갈증과 외로움은 먹고 마시고 만난다고 해결되는 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현대의 우리는 어떤 허전함을 분명 느끼지만,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채 자기의 "배를 하느님으로 삼으"며(필리3,19)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거나 바라고 함부로 욕망하며, 허전함이 어떻게든 채워지기를 바라며 여전히 어떤 갈망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함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소금물을 마시면 오히려 더 큰 갈증에 시달립니다. 우리 허기짐과 목마름은 그저 먹고 마신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삶과 영혼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빈자리를 내 손으로 채울려고 할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살게 하시며, 우리를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항상 내어주시는 그 분께 의탁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풍요로운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